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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 이창대/엄원태/박재삼/프랑시스 잠 /황강록/박화목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6. 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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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이창대

 


그대 떠난 마음의 빈자리
아플지라도,
숨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
서러웁고
저기서 울리는 종소리
외로워도
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
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그대 떠난 마음의 빈자리
아플지라도
나에게 잠들게 할
너의 그림자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작자의 말-"언제나 나는 침묵 속에서 실험하고, 침묵 속에서 낱말을 선택하여 한 편의 시가

   완성된 것으로서 있게 하기 위하여 무진 애들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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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엄원태

 

 

이 저녁엔 노을 핏빛을 빌려 첼로의 저음 현이 되겠다.

결국 혼자 우는 것일 테지만 거기 멀리 있는 너도

오래전부터 울고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날카로운 선율로 가슴 찢어발기듯 흐느끼는 동안 나는

통주저음으로 네 슬픔 떠받쳐주리라

우리는 외따로 떨어졌지만 함께 울고 있는 거다

오래 말하지 못한 입, 잡지 못한 가는 손가락,

안아보지 못한 어깨, 오래 입맞추지 못한 마른 입술로 ......

 

 

 

―시집『물방울 무덤』(창작과 비평,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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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哀歌)


박재삼

 


이 세상 얼마나 많은 착한 이들이

서로 등도 못 기대고 외따로들

글썽글썽 마음 반짝거릴까.

 

어찌어찌 하다가 어울렸으랴

무논에선 개구리 울음이 반짝거리고

아슬히는 하늘에 별도 반짝거리네.

 

저 반짝거림들을

받아서 다시 비추는

무수한 무수한 임자들

 

등도 없는 칠칠한 밤을,

그 밤의 줄기 끝에 달린 열매들을,

이슬이 영롱한 가난한 사람들을.

 

 


―『박재삼 시전집 1』(민음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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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哀歌) 제14


―프랑시스 잠(1868∼1938)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눈이 오네.” 너는 말했다.
“눈이 오네.” 나는 말했다.


“좀더, 좀더” 너는 말했다.
“좀더, 좀더” 나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너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나는 말했다.


그런 뒤, 너는 말했다.
“난 네가 정말 좋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난 네가 더 정말 좋아.”


“여름은 갔어.” 너는 말했다.
“가을이 왔어.” 나는 답했다.


그 뒤 우리의 말은
처음처럼 비슷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너는 말했다.
“내 사랑아, 네가 참 좋아.”


매맑고 숭고한 가을날의
노을 눈부신 저녁빛을 받으며.


나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주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37』(동아일보. 2014년 3월 26일)

 

 

 

애가(哀歌) 제14


―잠

 


―내 사랑아” 너는 말했다.
―내 사랑아” 나는 말했다.


―눈이 온다.” 너는 말했다.
―눈이 온다.” 나는 말했다.


―좀더, 좀더” 너는 말했다.
―좀더, 좀더” 나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너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나는 말했다.


그런 뒤, 너는 말했다.
―난 네가 참 좋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난 네가 더 좋아.”


―여름은 갔어.” 너는 말했다.
―가을이 왔어.” 나는 답했다.


―그리고 난 뒤 우리의 말은
처음처럼 비슷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너는 말했다.
―사랑아, 네가 좋아.”


매맑고 숭고한 가을날의
화려한 저녁빛을 받으며..


그 말에 나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렴.”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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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가(哀歌)


  황강록

 


  나는 고대의 시인들이 멸종하지 않은 것을 보았네. 뒷골목에서
  그들은 늙은 채로, 여전히 어린 채로 있었네


  음유시인들은 시를 읊고 노래하였으며, 신을 매개하던 명상가들이었네. 그들은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연극하였네. 그들의 몸이 상징이 되곤
  하였네. 불길한 소문과 음악소리를 따라 밤을 떠돌면 나는 그들을 만날
  수 있네. 그들의 눈은 도시의 구석에 뚫린 구멍, 검은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이가 없네. 웅얼


  거리는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네. 종이 위에서도, 광인의 하얀 진단서 위
  에서도 그 말들은 정리되지 않고 꾸물거리네. 노래와 피리 소리
  는 거침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 뿐, 사랑을 노래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은 없네. 그들이
  희망을 노래하더라도 거기에
  희망은 없듯이, 노래할 수 없는 것을
  노래하는 이들을 나는
  보았네. 클럽에서, 이동식 앰프에서


  웅얼거리는 이들은 명상에 젖어,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오공 뽄드와 소주는 피안으로 이르는 값싼
  재물, 위험한 재물은 경찰도 잡신들도 손대려 하지 않
  네. 위험한 언어는 슬프고 높은 신에게 바쳐져
  조서에도 남아있지 않
  네. 그들의 사망 신고서는 해부용의 메스로도 가를 수 없는 깊고   하얀 심연에 있네. 겁먹은 의대생들은 하얀 시트 위에서 칼을 들고 우네. 그들이 알 수 없는 막연한 죽음이 뻔뻔스럽고 서글프게 벌거벗은 채

   .......


  은밀한 화장터에서조차 그들은 연기를 남기네. 노래는 검게 검게 하늘로 올라
  가고, 집 나간 아이들은 무엇에 홀렸던 듯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오네. 돌아올 집이 없어도 끝없이 돌아오려
  하네. 돌아갈 곳이 없어도 나는


  고대의 시인들이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음을
  아네. 우린 어느 뒷골목에서 코피 흘리며, 소주 마시며 다시
  만날 거라네 살아있는 한, 노래하고, 웅얼거리며,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이
  없어도, 명상하고, 연극하며, 살아 있지 않아도
  이 도시는 여전히 폐허로서 아름다울 것이네


 

 

―시집『지옥에서 뛰어놀다』(시인시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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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애가


박화목

 

 

어제는 너의 초록빛 울음으로 하여
산딸기가 빨갛게 절로 익었는데


오늘은 하얀 달이 파랗게 질려
하현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들 운명이 쇠잔하여
죄없는 자랑이던 그 투명한 두 날개가
탈락하고 말 것이다.


욕설과
변명과
부조리의 잡초 속에서


아, 무엇을 바라리요.
바라리요?


다만 종말의 날에
정결한 찬이슬이라도 흠뻑 마셨으면 ......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