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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 경작 / 고향의 천정(天井) / 절정의 노래 1 / 삽 한 자루 ―山詩·51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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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경작


이성선

 


새벽에 농부는 밭을 간다.
쟁깃날에 햇빛이 갈리어
밭고랑에 넘어진다.


고랑마다 번쩍이는 하늘 물소리.


밤내 껴안고 신음하던
마음의 밭뙈기를 꺼내
벌판에 펼쳐놓고
힘껏 갈아가는 농부


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
밭을 간다.
돌밭을 갈고 바람을 갈고 산악을 갈고
아내의 바닥에 고인 슬픔을 갈고
아이의 눈 속에 핀
새소리를 갈고.


그가 갈아온 밭고랑에
고인 눈물
하늘에나 빛나는 가난한 물빛


일생을 갈고 와 이제
황혼의 밭끝에 섰다.
그의 발 아래 다 갈려 넘어진 벌판
찢긴 밭고랑에 핏빛으로 타는 놀


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잠기고 있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시인사. 1979 ; 『이성선 시전집. 시와시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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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천정(天井)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시인사. 1979 ; 『이성선 시전집. 시와시학사.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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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의 노래 1


이성선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영혼은 바람으로 떠돌며
고절(孤絶)을 노래하리.
그곳에는 죽는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무(無)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
침묵의 바위가 무거운 입으로
신비를 말한다.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에서
무일푼 거지로
최후를 마치리.

 

 


(『절정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1 ; 『이성선 시전집. 시와시학사.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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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 한 자루
―山詩·51

 
이성선

 


삽 한 자루 벽에 기대 섰다


흙을 어루만져 씨를 묻고
밭을 뒤집어 노을 갈아 밤을 심어
새벽 열고
 

지금은 묵묵히
몸을 씻은 후 집에 돌아와
벽 앞에 서 있다
 

적막한 평화로움
 

나의 손에 부려질 때와는 달리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심히 자기로 돌아가 있다


그러나 저 깊은 손이 어느 날
대지 위에 나를 묻어
하늘로 돌려보내리라

 

 


(『산시』 시와시학사. 1979 ; 『이성선 시전집. 시와시학사.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