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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 청포도 / 절정 / 교목 / 광야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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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1939. 8: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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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고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 1940. 1: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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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인문평론』. 1940. 7: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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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문장』. 1939. 8: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김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