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팽나무
이재무
어릴 적, 아부지의 회초리가 되어
공부나 심부름에 게으른 날엔
종아리 파랗게 아프게 하고
식전부터 일 나가신 엄니 아부지
기다리다 지치는 날엔
동무보다 재미있는 장난감되어
하루해전 무료 달래어주던
나의 선생 나의 누이인 나무
지금도, 안부 챙기러 고향 갈 적에
반쯤 허리 숙인 채
죽은 엄니 살았을 적 손길로
등 두드리는
이 세상 가장 인자한 어른
기쁠 때 쏟은 한 말의 웃음
설을 때 쏟은 한 가마 눈물
뿌리로 가지로 쑥쑥 자라는
우리 동네 제일로 오래된 나무
(『섣달그믐』.청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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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식사
이재무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부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의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 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이며
베어 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붕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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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어보는 것이다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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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이재무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문학과지성사.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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