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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 천상병/최종천/고정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5.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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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천상병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느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 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뿐이었는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성취다.
하느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84 12.『현대문학』에 발표.
2행
어디론지-->[어디로든]
4행
하느님-->[하나님]
6행
내-->[나] 로 발표
7행
신혼여행뿐이었는데-->『저승 48』(일)에는 [신혼여행뿐인데]로 재수록.

 

― 시집『언덕』(천년의시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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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최종천

 

 

참을 먹고 올라가다가 그는 추락했다
의정부에서 인천까지 출근하는 그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 아내와 다투고 뻐스에서 전철로
다시 뻐스로 갈아타고 늦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의 날개는 먼 계절을 날아온다
그는 무게를 날개에 걸고 있었다
몇 개의 적금통장과 아파트가 그것이다
그가 일하는 십층쯤의 높이에서
모르게 날개를 펴 보았을까
적금통장을 펴 보듯이 가뿐하게.
그의 날개가 깃털이 다 빠져 버린 것인지
나는 그의 날개를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가 십층까지 오르는데는
날개가 있었으리라,
그는 여러 개의 에치빔에 부딪히면서 떨어졌다.
그야말로 피 떡이 되었다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고사도 지내지 않던가 돼지머리로 말이다.
나는 태연하게 그의 살을 쓸어 모았다.
합판으로 덮어 놓았다. 대부분은 모른다.
아무래도 이 지폐 몇 장이 그의 깃털일 것 같지는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날개와는 달리 욕망은 착륙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이미 합의한 바 있다는 사실이다.

 

 


―시집『눈물은 푸르다』(시와시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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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고정희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 기운에 구워 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 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성신 술잔 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 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 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 보고
떨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인두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 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2』(또하나의문화,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