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산 ♠ 시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 / 손세실리아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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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


손세실리아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흰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끈 눈물 같은 사리 한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

 


 

―시집『기차를 놓치다』(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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