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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에 올라보면
황진성
큰 산에 높이 올라 보면 안다
나무는 모두 계곡을 굽어보고 있다는 것을
깊은 계곡일수록 나뭇잎을 켜켜이 담아두고
그 은밀한 장소를 살짝 열어둔다
이두박근을 실룩이며 드나드는 다람쥐 품어주고
오소리도 호기심에 눈을 껌뻑이며 다녀가고
밤이면 퇴근한 늑대도 찾아올지 모른다
계곡의 음부는 사시사철 열려 있어
나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무들은 불구를 다스려온 궁궐 속 내시같이
이른 새벽 모두 깨어 한 곳을 바라본다
새들이 산의 공기를 팽팽하게 쥐었다 편다
뾰족한 부리로 공기방울을 콕콕 뚫어 놓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잎사귀가 눈을 반짝이면
또로록 눈알로 떨어져 내리는 아침
부지런한 다람쥐가 두리번거리고 나오며 합장을 하다
등에 떨어진 찬 이슬방울에 깜짝 놀라 냅다 줄행랑친다
봄이 오는 이른 아침 산,
가만히 귀 기울이면 땅을 뚫는 풀씨의 가냘픈 신음소리
흙들이 서로 몸을 밀치고 움찔거리며 숭숭 창을 내는 소리
나뭇잎이 쉬하며 손가락을 입에 대는 동안
햇살은 가만히 계곡을 훑어 주며 천천히 빠져 나간다
―반년간『시에티카』(2010.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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