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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 문정희 / 이기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1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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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안도현 외 지음『소월시문학상작품집』(문학사상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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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시집『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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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에서

 

정문규

 

 

지금까지 받은

사랑의 선물

다시 돌려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받아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단풍잎 제 마음도

함께 부칩니다

 

그 동안 다정했던

봄과 여름도

고마웠습니다

 

답장은 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하얀 겨울로 가는

망각의 열차를 탔거든요

 

안-녕-히-계-세-요

  

 

 

-시집 『행복 체인점』(문학공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