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윤금초
소백산 먼 기슭, 갈옷 입고 앉은 부석사 무량수전
풍화된 눈꺼풀 위로 허리 휜 낮달 굴러온다.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긴 마당.
초망(草莽)에 발 묻고 지낸 푸른 세월 수백년
아 고요히 눈 뜨는가, 주심포(柱心包)에 새겨진 의상(義湘)의 그윽한 그 눈빛
솔거의 솔 그늘 넘실 오체투지로 엎드리고.
동자승 닮은 안산(案山)발치 아래 앉혀 두고
아미타경 몇 구절 물그늘에 띄워 놓자
금시조 두어 마리가 그걸 물고 건듯 가네, 가네.
ㅡ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땅끝』(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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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하늘
윤금초
그리움도 한 시름도 발묵(潑墨)으로 번지는 시간
닷되들이 동이만 한 알을 열고 나온 주몽
자다가 소스라친다, 서슬 푸른 살의(殺意)를 본다.
하늘도 저 바다도 붉게 물든 저녁답
비루먹은 말 한 필, 비늘 돋은 강물 곤두세워 동부여 치욕의 마을 우발수를 떠난다. 영산강이나 압록강가 궁벽한 어촌에 핀 버들꽃 같은 여인, 천제의 아들인가 웅신산 해모수와 아득한 세월만큼 깊고 농밀하게 사통한, 늙은 어부 하백(河伯)의 딸 버들꽃 아씨 유화여, 유화여. 태백산 앞발치 물살 급한 우발수의, 문이란 문짝마다 빗장 걸린 희디 흰 적소(謫所)에서 대숲 바람소리 우렁우렁 들리는 밤 발 오그리고 홀로 앉으면 잃어버린 족문 같은 별이 뜨는 곳, 어머니 유화가 갇힌 모략의 땅 우발수를 탈출한다.
말갈기 가쁜 숨 돌려 멀리 남으로 내달린다.
아, 아, 앞을 가로막는 저 검푸른 강물.
금개구리 얼굴의 금와왕 무리들 와 와 와 뒤쫓아 오고 막다른 벼랑에 선 천리준총 발 구르는데, 말 채찍 활등으로 검푸른 물을 치자 꿈인가 생시인가, 수천 년 적막을 가른 마른 천둥소리 천둥소리…… 문득 물결 위로 떠오른 무수한 물고기, 자라들, 손에 손을 깍지끼고 어별다리 놓는다. 소용돌이 물굽이의 엄수를 건듯 건너 졸본천 비류수 언저리에 초막 짓고 도읍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도(四神圖) 포치(布置)하는, 광활한 북만(北滿)대륙에 펼치는가 고구려의 새벽을…….
둥 둥 둥 그 큰북소리 물안개 속에 풀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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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윤금초
반도 끄트머리
땅끝이라 외진 골짝
뗏목처럼 떠다니는
전설의 돌섬에는
한 십년
내리 가물면
불새가 날아온단다.
갈잎으로, 밤이슬로
사뿐 내린 섬의 새는
흰 갈기, 날개 돋은
한 마리 백마였다가
모래톱
은방석 위에
둥지 트는 인어였다.
상아질(象牙質) 큰 부리에
선지빛 깃털 물고
햇살 무동 타고
미역 바람 길들여 오는,
잉걸불
발겨서 먹는
그 불새는 여자였다.
달무리
해조음
자갈자갈 속삭이다
십년 가뭄 목마름의 피막 가르는 소리,
삼천년에 한번 피는
우담화 꽃 이울 듯
여자의
숙 깊은 궁문(宮門)
날개 터는 소릴 냈다.
몇날 며칠 앓던 바다
파도의 가리마 새로
죽은 도시 그물을 든
낯선 사내 이두박근……
기나긴 적요를 끌고
휘이, 휘이. 날아간 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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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새야, 할미새야
윤금초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핏집 울리는 죽비 소리 남기고.
등이 허전하여 등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가장(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는 앞산,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오고 밀려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불리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파릇파릇 핏줄 돋는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가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놓고…….
ㅡ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땅끝』(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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