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이슬방울
이태수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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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 또는 물에 대하여
이태수
허공이 우주를 끌어안고 있듯이
그 무엇이 나를 떠받들고 있다.
무거운 땅덩어리가 허공에 달려 있듯이
내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매달려 있다.
허공은 부드럽고, 그 무엇은 모양도 없지만
완강하게 나를 부둥켜안고 있다.
우주가 모양도 없는 저 허공 안에 있듯이
나는 안 보이는 그 무엇 안에 들어 있다.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이 땅을 들어올리듯이
그 무엇이 나를 일으켜 앉히거나 세운다.
그 무엇은 안 보이고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나를 이토록 깊숙이 품어 앓게 한다.
물이 마침내 쇠를 삭게 하고, 물방울이
한결같이 떨어져 돌을 뚫듯이, 나는 물이 되고
물방울이 되어 돌을 뚫고 쇠를 녹이리.
낮고 부드럽게 비어 있는 그 무엇이
마음을 가득 채우듯이, 비어있지만
뭔가 가득 채워져 있는 허공이
나를 흔들어 눈뜨게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듯이,
일어나 바라보면 아득한 세상, 아득하므로
걷고 또 걷게 하는 세상이 눈물겨워
쇠를 녹이고 돌을 뚫으리. 나는 물방울이 되고
물이 되어 천천히, 오래오래
부드럽게, 낮게, 비워지고, 또 비워져서.
(『내 마음의 풍란』.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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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낮에 꾸는 꿈
이태수
1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투명해지는 말들.
물방울 안에서 바라보면, 길들이 되돌아와
구겨진다. 발바닥 부르트도록 걷던
그 길들 너머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나날들, 아득한 곳에서
둥글게 그가 미소를 머금고 서 있다.
그렇게도 꿈꿔왔던 투명한 말들이
비로소 물방울 되어 글썽인다,
햇살은 그 위에 뒹굴다 굴러 떨어진다.
글썽이며 나는 자꾸만
남은 햇살을 끌어당긴다.
2
집을 짓는다 남루한 세월이지만
마음만은 늘 푸른 하늘 자락을 끌어안는다.
새들이 어디론가 아득하게 날아가고
돌아올 것 같지도 않지만, 마음은 제 홀로
해종일 두리기둥을 만든다. 서까래들을 다듬고,
흙일도 하고, 방을 꾸며 도배도 한다.
사랑채도 짓는다
자그마한 창틀로 뛰어내리는 햇살,
마음은 벌써 뒷마당을 한 바퀴 휘돌아
눈길을 멀리 창밖에 던져놓고 있다.
다시 그는 기척도 없지만, 어느새 걸어왔는지,
앞산이 우두커니 앞마당에 서 있다.
해종일 걸어온 낯익은 길들도 문득 낯설어지고
나뭇잎들이 자꾸만 땅위에 내리고 있다.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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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은 둥글다
이태수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
모가 난 나의 집, 사각의 방에서
그를 향한 목마름으로 눈감으면
지금의 나와 언젠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검고 깊게 흐르는 강.
모가 난 마음으로는
언제까지나 건널 수 없는 강
신과 인간의중간 지점에서 그는 그윽하게,
먼지 풀풀 나는 여기 이 쳇바퀴에서 나는
침침하게, 눈을 뜬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
(『그의 집은 둥글다』. 문학과지성사. 199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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