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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
고미경
당신은 나의 하나뿐인 집이어서 세상의 누추한 노동을 견디고 내가 돌아가는 곳이지만 가슴 아픈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화살을 맞고 피 흘리는 프리다 칼로의 사슴은 소리를 지르거나 울지도 못하고 가시울타리 속으로 파고들었지요
안아줄 수도 보내줄 수도 없는 가엾은 짐승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도 사랑이라면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울울한 푸른 가시들도 사랑인 거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지요
오래 된 어느 부족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며 몸에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다지만 몸에서 꽃을 피우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 이 생각 끝에선 꼭 내가 울게 됩니다
그런 날은 나를 찌르던 가시에서 둥글고 하얀 꽃잎들이 피어나곤 했습니다 아파도 웃고만 있는 꽃잎들은 어쩌자고 제 피를 걸러서 향기를 길어 올리는지……
하염없이 그 곁에 서 있으면 어느 겨울밤 함박눈송이들 도란거리는 기척에 깨어 마음에 호롱불을 내다걸던 때처럼 당신은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집이 되었습니다
―『문학·선』(2012. 가을)
―『시산맥』(2014.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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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향기
장석남
두 다리 오그리고
손은 모아 가슴에 붙이고
눈 감아 귀뚜라미의 개금불사(改金佛事) 듣는다
'이제 탄식은 없어
벌써 늦가을이야'
탱자 향기
탱자의 향기
오솔길로
가면 거기
나오는 나라
깨금발로 나오는 나라
―시집『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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