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이진명
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몸을 뒤틀며 나무를 밀어댔지만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등에 깃털이 떨어진다. 오, 놀라워라. 보드랍고 따뜻해. 가여워라. 내가 그랬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착한 아기. 나는 나를 나무에 묶어 놓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으련다. 작은 새 놀란 숨소리 가라앉는 것 지키며 나도 그만 잠들고 싶구나.
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중에.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 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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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福者)수도원
이진명
내 산책의 끝에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복자수도원은 길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붉은 벽돌집이다
그 벽돌빛은 바랬고
창문들의 창살에 칠한 흰빛도 여위었다
한낮에도 그 창문 열리지 않고
그이들 중 한 사람도 마당에 나와 서성인 것 본 적 없다
둥그스름하게 올린 지붕 위에는 드문드문 잡풀이 자라 흔들렸고
지붕 밑으로 비둘기집이 기울었다
잠깐이라도 열린 것 본 적 없는 높다란 대문 돌기둥에는
순교복자수도회수도원(殉敎福者修道會修道院)이라 새겨진 글씨 흐릿했다
그이들은 그이들끼리 모여 산다 한다
저녁 어스름 때면 모두
聖衣자락을 끌며 긴 복도를 나란히 지나간다고 한다
비스듬히 올라간 담 끄트머리에는 녹슨 외짝문이 있는데
삐긋이 열려 있기도 했다
숨죽여 들여다보면
크낙한 목련나무가 복자수도원, 그 온몸을 다 가렸다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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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녀(貞女)의 집 영산선원(靈山禪院)
이진명
바닷가 황폐한 마을
배 들어오고 나가는 일 없어져버린 옛 포구 마을에
정녀의 집 영산선원이 있습니다
포구 사람들이 버리고 간 갯벌을 넓게 앞자락에 펼치고
둘레의 정적 속에서도 환하게 있습니다
우주일원상에 종신서원한 처녀들
늙거나 젊거나 한 둥근 처녀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처녀들 끈적이는 갯벌을 끌어안고
검게 이운 바다숲을 끌어안고
뒤로 소슬한 영산자락 의지해 기도 생활합니다
한나절은 모두 뒤 산밭으로 나가 땀 흘리고
돌아오면 우주일원상만큼 둥글고 커단 연못가에 겹겹 꽃을 가꿉니다
둥근 처녀들이 모두 산밭으로 일 나간 사이의
빈 영산선원은 저 홀로 크게 놓인 거울만 같습니다
앞에 와 제 모습 비쳐볼 이라곤 전혀 없는 외딴 장소에
하늘만한 거울이 걸려 있는 격이랄까요
그 거울의 고요 헤치며 뜻밖의 손님이 찾아듭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게 한 마리 찾아듭니다
모래 익는 하얀 앞마당에 와 먼저 엎드리고
못난 걸음으로 한바퀴 마당을 돕니다
빈 영산선원이 이때처럼 차오르며 거울인 제 얼굴을 다 열어
시간의 황금빛 두 팔을 펼쳐드는 것 본 적 없습니다
펄떡이는 억겁 고요의 비늘 거느리는 것 본 적 없습니다
바닷가 황폐한 마을 영산선원에는
뱃길 끊어져 먼바다 넘어오는 큰 배 그리운
어린 게와 우주선원상을 돛처럼 올린 둥근 처녀들이
연년이 같은 조수를 타고 오르내립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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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초등학생
이진명
나는 그 소녀를 독거초등학생이라 부르련다
신문지상과 방송에 사회문제로 오르내리는
독거노인이라는 말을 본따서
소녀는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
단칸 셋방에 할머니와 둘이 산다
병중이던 할머니 2개월 전 돌아갔다
엄마는 집 나간 지 오래
아버지는 5년째 교도소 수감중
할머니 돌아가자마자 동사무소에서는
매달 지급해주던 생계보조비를 끊었다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는 것
보호자가 어쨌든 생존해 있으므로
소녀는 자격이 없다는 것
법이 그렇다는 것
그러든지 말든지, 소녀는 그런 따위는 몰라. 다만 이제 자신이 어엿한 독거인이 됐다는 것, 이 광막한 우주에 홀로 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됐다는 것은 아는 것 같다. 보라.
밥 짓는다
바가지에 쌀 씻어 솥에 안친다
방 청소한다
빗자루로 쓸고 쓰레받기로 받는다
옷 빨래는 대야에 넣고
비누질 찰싹찰싹
이웃이 넣어주고 간 밑반찬에
저녁밥 올려 먹고
깜깜해져 오네 불 켠다
형광불빛이 깜박깜박 깜박, 다섯 번만에 들어온다
엎드려 공책 편다
연필 꼭꼭 눌러 쓰기숙제를 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책가방 속에 잘 챙겨넣는다
이부자리 편다 베개 올려놓고
마지막 형광들 스위치를 탁, 내린다
불이 꺼지고
눈이 꺼지고
몸이 꺼져……
……아, 꺼져요. 하지만 나는 소녀가 무엇보다 형광등 불 켜고 끄는 일을 좋아할 거라고 상상한다. 쉽고, 무슨 놀이 같기도 하고. 탁 내리면 환했었는데 얼른 깜깜해지고. 툭 올리면 깜박깜박 다섯 번이나 술래놀이처럼 하다가 화화화 화안해지고.
저 멀리 장수에서 산다는 소녀의 일을 신문 하단 몇 줄 기사에서 본 후로, 그곳으로부터 흔들려 오는 빛과 소리를 자꾸 느낀다. 몇 차례 곁인 듯 파고드는 가늘은 그것, 빛과 소리. 몇 날을 번갈아 왔다갔다하더니 어느 하룻날은 둘이 함께 왔다.
소라-플라스틱통 같은 데서, 플라스틱 컵일지, 쌀을 한 컵 또는 두 컵 떠내는 소리. 역시 플라스틱 바가지일지, 떠낸 쌀을 담아 물 받는 소리. 조물조물 씻는 소리. 마지막 물 속 쌀알이 차륵이는 소리.
빛-파르르파르르 파르르파르르 파르르, 다섯 번이나 떨리다 들어오는 소녀의 방 형광등불. 펼친 공책 위에 새하얗게 깔리는 영광불빛. 형광불빛의 잔디밭 위에 엎드린 소녀. 꽃 나무 나비가 모이는 공책 칸칸마다 또 파르라니 쏟아지는 잔디.
그런데, 독거노인이라고 들었을 때는 밭은기침, 세발 수발, 오물 수발, 간병, 말벗 등의 여러 말이 으레 떠올라와 주는데, 독거초등학생이라고 불러봐 보니 아무, 아무 떠오르는 게 없다. 독거초등학생이라는 이름은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할수없게 하는 이름인가 보다. 생각이 막히는, 막혀버리는 그런 이름은 본따 짓지도 부르지도 말아야 하는가 보다.
나는 그 소녀의 독거초등학생이란 이름을 지우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딴 이름 지워지자마자 소녀는 저 아득한 우주 꽃씨로 잠들었다. 우주 어둠이 내려와 펼쳐진 채인 소녀의 알림장 보호자 확인란에 별을 박았다. 빛나는 우주 사인을 했다. 소녀 잠들기 직전 소녀의 꽃손을 빌어 쥐고서 했다.
(『단 한 사람』.열림원.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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