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등 - 이규리/서안나/김길용/박일만/김선우/문정영/장이엽/안도현/김지유...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11. 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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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등은 수식이야

등을 자주 보이는 사람 따라가지 마라지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있을 것 같았어요

 
반쯤이 공허라 해도

또 반쯤이 모호함이라 해도

 
우린 사실 그곳에 도착한 적이 있어요

 
언제까지나 늙지 않을 것처럼 뒤를 미루지만

달리 보여줄 게 없을 때

보게 될까 두려울 때

 
등이라도 내밀어야 했다는 것

 
무엇으로도 말 할 수 없는,

말해도 닿을 수 없는,

 
수식이라면 왜 뒤에 두었겠어요

 
다 알게 되더라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참도 있는 것

 
먼 불빛도 다가가보면 내 집이듯

 
등은 그런 먼 불빛 아닌지요

 

 

 

ㅡ문학무크『포항문학』(2014. 통권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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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풀과별 엮음『희망의 레시피』(문화발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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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종

 

 

사람의 등이 얼마나 따스한지

또 얼마나 아늑한지는

등에 업혀 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등이 얼마나 차가운지

또 얼마나 매정한지는

돌아서는 뒷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안다

 

따스하게 업어 주지 않았어도

누구에게나 훌쩍 등지지는 말 일이다

 

낙엽 지는 가을날은

석양을 등지고 홀로 걷는 이에게

가만히 등을 내어 주고 싶다

 

 


―시집『이 풍경에서 이제 나는 지워지려 한다』(띠앗,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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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기대오는 온기가 넓다

인파에 쏠려 밀착돼 오는

편편한 뼈에서 피돌기가 살아난다

등도 맞대면 포옹보다 뜨겁다는

마주보며 찔러대는 삿대질보다 미쁘다는

이 어색한 풍경의 간격

치장으로 얼룩진 앞면보다야

뒷모습이 오히려 큰 사람을 품고 있다

피를 잘 버무려 골고루 온기를 건네는 등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두 다리를 대신해

필사적으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사람과 사람의 등

비틀거리는 전철이 따뜻한 언덕을 만드는

낯설게 기대지만 의자보다 편안한

그대, 사람의 등

 

 

 

―시집『사람의 무늬』(애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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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시집『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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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문정영

 

 

  거울에 비친 등은 쓸쓸하다. 죽은 날벌레 같은 뾰루지 몇 개를 달고 있다. 원형이 사라진 엉덩이와 뼈대가 보이는 척추를 따라 머리칼은 오래된 이력처럼 적을 것이 없다. 내내 앞의 눈치에 뒤를 열어두지 못한 사내의 모습이 거기 있다. 사랑은 앞에서 오는 것이라고, 뒤태를 소홀하게 대하더니 어느 하나 비추지 못한다. 귓속말처럼 등은 소소한 일을 처리하면서 많은 굴욕을 겪었다.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중심이 생겼다. 쉽게 붉히는 얼굴을 가진 앞은 결핍성을 감추고 있다. 등은 스스로를 비추는 줄 모르고 비춘다. 등은 뒤돌아서도 등이다.

 

 

 

―계간『시안』(2011, 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 시 100선』(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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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等)


장이엽

 


비주류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이름이다.


열거된 각각의 명사 뒤에서 때로는 '들'로
때로는 '따위'로 바뀌어 불리기도 하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초대 손님


솜털로 채워진 낙타의 귓속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등'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위 그늘에 주저앉아 종일토록
바람을 기다리는 노루귀가 되어본 당신이라면
'등'의 구별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여!
행여나 부피를 재려고 실린더 눈금을 읽게 될 때는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말고
밑에서 올려다보지도 말고
눈높이를 액체 표면과 수평이 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당신 옆에서 간간이 물잔 비우는 나 등을 만나거든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는 나 등을 만나거든


당신의 이름을 받쳐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기뻐해 주시라.
당신의 얼굴을 밝혀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반가워해 주시라.

 

 


―격월간『유심』(2010,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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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안도현

 

  내 눈 밑으로 열을 지어 유유히 없는 길을 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내려다본 적 있다. 16층이었다

 

  기럭아,기럭아

  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

  내가 몹시 잘못했다

 


 
―시집『북항』 (문학동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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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유

 


그대 등 뒤에

다소곳이 앉아

하룻밤만 있을게

뿌려대는 소금을 알몸으로 받아

뼛속 들춰가며 집어넣을게

심장까지 메마를 거야

 

누군가의 애인일 뿐

아내는 될 수 없는 여자

그러니 하룻밤만 있을게

새벽 동터오면

짠물에 칭칭 감긴 머리카락

풀어헤치며 일어나야지

소금 던져준 그대에게 꾸벅

인사도 잊지 않을 거야

 

얼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사랑을 낚는

그대의 등은

누렇게 타버린 아랫목, 화투패를 만지던

할아버지의 등 같아

 

하지만 난

그대 품에 안겨 본 적 없는 아내

이젠 애인도 될 수 없는

소금덩어리, 절여진 몸뚱이가

흰 소복 걸친 채 굳을 때까지

돌아보지 마

 

 

 

―시집『액션페인팅』(천년의시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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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은 없다


정철훈
  

 

버스가 내 앞에 정확하게 멈춰 서지 않을 때

나는 좌절한다

기다린 건 버스였는데

실은 버스의 출입문을 기다린 것이 되고 만다는 좌절

 

퇴근길 인파 사이에서

나보다 먼저 버스에 오르는 사람의 등을 보았을 때

두 번 좌절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등이 왜 다른 사람에게서 보이는지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승차하는 사람들이 연출하는

무작위의 순열 속으로 내가 빨려들고 있다는 좌절

나에게 다가서기까지

나의 등은 없다

 

버스 문턱에 먼절 발을 올려놓으려는 혼란 속에서

나의 발은 발이 아니라 혼돈이다

모두들 등을 맞댄 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윤중올 벚나무들이 무장무장 꽃잎을 떨구는 화신(花信)을 해석하느라

입을 굳게 다물 때

나의 입은 없다

 

나에게 다가서기까지

나는 무참히 지워져야 한다

마침내 너에게 가기 위해

버스가 씹다만 벌레처럼 퉤, 하고 나를 뱉어낼 때

가장 멀리까지 날아가 떨어지기를

 

내가 나를 타고 가는 이 불편한 승차감

인식하는 순간에 두 깨로 쪼개지는 이 존재감

모두 마법에 걸려 있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지워져 있다


 
 

―계간『서정시학』(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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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대한 생각


이상국

 


나는 나의 등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나에 대하여

때로 등을 돌리든 말든

거기까지가 나의 영역이다

등에는 면목이 없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업혀 다니는 이유다

손으로 악수를 꺼낸다던가

안면을 집어넣거나 하는

은근한 주머니도 없이

 

그는 천부적인 나의 객지다
 
제삿날 절하는 아버지처럼

구부정하고 쓸쓸한 힘이다

 

 


―계간『애지』(2013.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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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가렵다

 

김명기

 

버림과 비어 있음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요즘은 자꾸 등이 가렵다
뒤꿈치 치켜들고 몸을 비틀며
어깨 너머 허리 너머 아무리 손을 뻗어도
뒤틀린 생각만 가려움에 묻어 손끝에 돋아난다

나와 내 몸 사이에도
이렇듯 한 치 아득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
두렵고 신비스럽다

빛과 어둠,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수리 어디쯤
죽음에 이르러야 열리는 문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 같고
때론 소슬바람에도 쉬 무너질 것 같은 그 무엇이
내 안 어딘가 덜컹거리고 있다

등이 가려울 때마다
등줄기 너머 보이지 않는 길들이 그립다

 

 

 

ㅡ시집  『등이 가렵다』(문학의전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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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등

 

박현수

 

 
제 손이 닿지 않는 등이 있어

아들과 나는

동네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아버지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이

아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아들에게도 제 손길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것이

아버지에게 위안이 되는 시간

손닿지 않는 그 먼 곳에

남이 읽어서는 안 될

무슨 운명이라도 적혀 있다는 듯이

한 글자씩 짚어가며 읽어줄

피붙이가 필요하다고

때밀이 수건을

등 뒤로 건네고 건네받는 것이다

 
제 손이 닿지 않는 등이 있어

아들과 나는

따뜻한 안개 속에 순한 짐승이 되어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맡는 것이다

 

 

 

ㅡ『포엠포엠』2012. 여름)
ㅡ김석환·이은봉·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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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시집『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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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등

 

고영민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시집『공손한 손』(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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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뒤

 
조은

 

 

등뒤가 서늘하다

뒤처져 걷는 네가

울고 있다!

 

파장이 느껴진다

들먹이는 어깨가 느껴진다

눈물이 양식인 듯

입 속으로 자꾸 흘러 들어간다

네 말은 끊길 데가 아닌 데서

이어지질 않는다

 

너는 검은 웅덩이처럼

세상을 밖으로만 끌어안았따

내가 그 속을 보려 했다면

우린 벌써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고르고

수면을 때리는 돌멩이처럼

기습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얼굴 가득

바위의 이음새 같은 주름이 접힌

너는 눈물을 감추려

얼른 등을 보인다

 

네 등뒤가

서늘할 것이다

 

 

 

―웹진『문장』(20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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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이 없는 풍경

 
  이화은
 

 

  ―당신은 벼랑 끝에 선 누군가의 등을 떠민 적이,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등 뒤에 잠시 목숨을 걸어두었다가 아주 잃어버린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지하철의 피 묻은 기억이 그렇고 휘파람 불던 그 고래도 등에 작살이 꽂혔다고 한다

  등나무는 아예 등이 있던 자리에 꽃 같은 조등을 내다 걸었다

 
  강가에 바싹 붙어 앉은 낚시꾼

  제등에 얼마나 많은 충동의 시위가 당겨졌는지 아는 것일까 모른 척

  등허리에 과녁을 내다 걸고 열심히 찌만 노려보고 있다

  모른 척, 흘러가는 저 강물이 등을 보일 때 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것이리라

  순식간에 유수와 같은 시간의 등을 낚아채려는 교활한 느긋한 속셈일 것이다

 
  어둠이 뚜벅뚜벅 걸어와 강가의 등을 거두어가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러나 설문지에 아무 대답도 쓸 수 없었다

  모든 질문이 다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호주머니의 야음 속에 두 손을 깊이 찌른 사람들이 하나 둘 현장을 떠나고 있었다

 

 


―월간『현대시학』(200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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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을 만지다

 

  강윤미 

 
 
  이를테면, 등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 온전한 모습을 나는 알 수 없다 거울에 비친 볼록한 어깻죽지와 반쪽짜리 얼굴 왜 눈동자와 마주쳐야 겨우 뒤를 엿볼 수 있는 걸까 


  등뼈를 덮고 있는 거죽의 감촉은 시선의 욕망이다 등은 생각한다 누가 날 만져줬으면, 말 좀 걸어주었으면…… 뒷모습은 그 사람이 내게 가장 하고 싶은 말 그래서 못다한 말 떠나는 애인과 출근하는 아버지의 목덜미, 때를 밀어줄 때 찬찬히 훔쳐본 어머니의 등허리
 

  등을 만진다는 것은 누군가가 세상에 새겨놓은 글자를 읽는 것 구름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하늘, 나뭇잎의 계절을 쥐고 있는 바람, 푸른빛이 주무르는 바다, 히말라야의 산등성이를 쓰다듬는 눈보라, 燈의 등을 감싸는 불빛, 슬픔의 어깨에 기댄 고독, 사막의 숨 속으로 걸어가는 낙타의 발자국으로부터
 

  아이를 업은 어미까지 

 
  등을 휘감아오는 病의 기척, 나는 당신의 얼굴이 그립다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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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시집『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