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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 송재학/김사이/강신용/함성호/박숙이/박형준/이재무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10. 2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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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송재학

 

 

내가 마셔야 할 독의 양만큼
단풍 화물을 실은 기차가 오긴 했다
내 눈동자 안쪽 갱도에서 서행하는 기차는
증기기관,
여정을 단축하는 기차가 있다면
피를 토하는 기관사도 있다
커브에서 덜컹거리는 게 너무 깜깜하여
붉은색과 노란색이 서로 치명적인 줄 알겠다
멀어져가는 선로가 흑백으로 바뀔 때쯤
간이역이 마중 나왔다
잡목림이 말끔하게 하역한
붉은색과 노란색 음역音域은
간이역 확성기의 힘을 빌려
번질대로 번졌다
단풍에게
붉은색과 노란색은 더 필요하겠지

 

 

 

ㅡ계간『시안』(200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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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김사이

 
 

단풍이 화냥년같이 물들었다

붉게 붉게 타는 단풍

월경하는 내 뜨거운 꽃보다 더 진한

 
우리 따알 우리 딸이여라우
 

장롱 깊숙이 숨겨놓은 결혼식 액자엔

지우개로 지운 듯 자국만 남아

본처의 그늘 아래 희미한 자국으로 살아온

당신의 인생을 딸도 밟아갈까

평생 끓인 속앓이가 축축하다

 
우리 딸이여어 나이만 묵었제 아직 아가씨랑께요

 
푸른 태양이 몸으로 쑥 들어와

자궁이 출렁

온몸 시뻘겋게 단풍 들었다

 
아랫도리가 열리며 붉은 어머니 나오신다

 

 


ㅡ계간『창작과비평』(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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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강신용

 

 

나는 알고 있다

 

역사에도

교과서에도 없는

 

10월 혁명

 

 

 

ㅡ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작품집『천 년의 하루, 하루』(시와에세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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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함성호

 


지나가네 지나가 버리네
그가, 그녀가, 당신이-


그냥 지나가 버리네
여기
너무 오래 단풍나무 아래서
그를, 그녀를 당신을 기다렸네


설레는 손짓은
단풍나무 잎사귀처럼
붉게 물들어가고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로
사랑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골몰한 생각들이 스치고
그냥
지나가버리네


그는, 그녀는, 당신은
훗날
어느 차가운 바위에 앉아
말하겠지


그때,
(단풍나무 그늘에서)
쉬어가야 했다고


우리가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쳐온 생의 기별들이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네

 

 

 

ㅡ월간『문학사상』(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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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박숙이

 

 

그가 물었다

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오랜 고심 끝에 나는 대답했다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다고

 

그랬더니, 며칠 만에 쓸쓸히 찾아온 그

짐승처럼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쨌던 속수무책으로 서로의 본능을 다 태웠다

 

아 나의 저항이 오히려

그의 태도를 확실히 불붙도록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대책 없이 건드린 죄여

네가 다 책임져라!

 

 

 

ㅡ시집『활짝』(시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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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박형준

 
 

  바람과 서리에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 무덤을 지키고 선 나무 한 그루, 저녁 햇살에 빛나며 단풍잎을 떨어뜨린다 자식도 덮어주지 못한 이불을, 속에 것 다 비워 덮어준다 무덤 아래 밭이 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종아리에 불끈 일어선 정맥처럼 혼자 자라 시퍼렇게 빛나는 무 잎사귀

  

 

 

―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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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이재무

 


목 놓아 펑펑 울려고

 

시간의 터널 무심하게 걸어왔다

 

초록의 지친 나날들

 

붉은 추억으로 남은 여자들

 

어깨 들썩이며 신명나게

 

울음의 잔치 벌이고 있다

 

눈치코치 보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고이 쟁여온

 

울음 꾸러미 꾸역꾸역 꺼내놓은 뒤

 

명태처럼 잘 마른 몸

 

또, 한기 속으로 밀어 넣는 여인들

 

한 보름 가을을 활활 울어서

 

닦아놓은 놋주발인 양

 

저리 반짝, 하늘도 황홀하게 윤이 난다

 

 

 

―『2010 제25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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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빤스

 
손택수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ㅡ시집『목련 전차』(창비,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