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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나희덕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 문병가자 / 함순례 -문병 /이명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10. 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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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여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시집『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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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처럼

순간이 순간을 불러 순간에 복무하는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ㅡ웹진『시인광장』(20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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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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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병 가자

 

   함순례 


 
    한 선배는 죽고, 한 선배는 늙었다

 

    아프지 않은 세상으로 떠난 선배는 환하게 웃고 있고 늙은 선배는 가슴뼈 드러내며 울고 있다 몸이 곯아 먼저간 녀석도 아프고 그냥저냥 버티고 있는 놈들을 봐도 아프다, 늙어가는 선배를 경청한다 누군가 떠나고 나서야 우르르 상가에 모이는 신발들은 깃발 여행처럼 창백하다 생전의 밥 한 끼가 얼마나 참한 배웅인가

 

   조문은 너무 늦은 안부
   차가운 안부, 꽃그늘 어질어질한 봄밤을 견디고 있다

 

 

 

ㅡ제2시집『혹시나』(도서출판 삶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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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

이명윤



엑스레이에 구름 낀 하늘이 찍힙니다,

어제 아팠던 내가
오늘 아픈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서로의 병명을 묻느라 이번 생은 다 소비하고 말 것 같습니다

병동을 들어서면 늘 벌거벗은 기분이 들지요
내 몸 구석구석 스캔하는 환한 불빛들, 가끔씩 숨을 멎고 눈을 깜박거려야 넘어가는 화면들
복도엔 오늘도 역시 알 수 없는 냄새들이 흐르고요 마스크로 가렸지만 눈빛을 숨길 수 없는, 질문들

신이 우리를 통제하는 지루하고 오래된 방식을 알고 있습니다
웃음은 어느 공사장 난간에서 골절되었다는군요
고요한 병동은 시간이 고여 있는 노란 연못 같습니다

당신은 누워 링거만 보고
우리는 서서 당신을 봅니다

아프지 말고* 살아가는 일, 이 세상에 없는 문장을 위하여
어제 아팠던 내가 오늘 아픈 당신을 위로하러 왔습니다
이것은 계절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연대

병실 문을 나설 때까지
그늘진 침대에서 돌아누워 있는 등을 봅니다
바위처럼 아픈 것입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숲 속에 혼자 있는 것입니다


*자이언티(Zion.T)의 노래‘양화대교’에 나오는 그 '아프지 말고’


​ㅡ웹진『시인광장』(201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