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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하게 잠이 들어 있다.
밤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 위로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넋을 잃고 잠이 들어 있다.
깊숙한 땅속 공간을 몸부림치듯 전철은 달리고.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년만큼 아득한 세월의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들판을 달리는데.
―월간『문학과창작』(200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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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핏기 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송두리째 넋을 잃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지하공간을 달리는데…
―시집『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시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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