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이성부
어느 날 밤 내 깊은 잠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아직도 깨끗한 손길로 나를 흔드는 손님이 있었다.
아직도 얼굴이 하얀, 불타는 눈의
청년이 거기 있었다.
눈 비비며 내 그를 보았으나
눈부셔 눈을 감았다.
우리들의 땅을 우리들의 피로 적셨을 때,
우리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사랑을 찾았을 때
검정 작업복을 입었던 내 친구
밤 깊도록 머리 맞대었던 내 친구
아직도 작업복을 입고 한 손에 책을 들고,
말없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아아 부끄러운 내 어깨 위에
더러운 내 세월의 어깨 위에
그 깨끗한 손길로 손을 얹었다……
《강북구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수호예찬의 비에 새겨져 있는 시》
우리나라 국립묘지가 몇 군데 있을까? 서울 동작구에 국립서울현충원, 대전 유성구의 국립대전현충원, 경남 창원에 국립3.15민주묘지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수유리 4·19묘지라고 부르지만 보수를 업은 진보 정권 김영삼 정부 시절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격상을 높여 명칭을 국립4·19민주묘지로 바꾸었다. 오랜 보수 정권 끝에 소나기 지나고 햇볕 나듯 잠깐 진보 정권이 들어섰을 때 이곳을 민주성지로 만들고자 열망을 했었다. 진보측에서는 국립4·19민주묘지 근처에 부지를 조성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이쪽으로 모시고자 했었다. 예산도 확보가 되었다고 했지만 여러 반대에 부딪혀 이 사업은 무산이 되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4번 출구로 나와 초록버스 01번을 타면 걸어갈 필요도 없이 국립4·19민주묘지 정문 입구에 버스가 선다. 진입광장에는 ‘國立四.一九墓地 민주성지’ 라는 안내석과 함께 ‘민주의 뿌리 탑’ 이 거대한 기둥처럼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정문을 지나 연못이 있는 다목적광장 중앙 계단의 상징문을 넘어서면 여기서부터는 참배대기광장 4·19학생혁명기념탑이 있는 성역의 공간이다. 이곳 성소 참배대기광장 중앙 정면에는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잔디밭 좌우에 궐기학생과 진압경찰로 구성하여 4·19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형상화 한 자유의 투사상이 있고 뒤로 수호예찬의 비가 좌우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서울 강북구에 소재하고 있는 국립4·19민주묘지 수호천사의 비에는 12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구상, 박목월, 정한모, 유안진, 이한직, 송욱, 조지훈, 윤후명, 김윤식, 장만영, 박화목 그리고 위에 소개한 이성부 시인의 시 ‘손님’이다. 그런데 이성부 시인의 시 말고는 4·19묘역에 새겨진 시들이 대부분 보수 성향 시인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혁명정신은 간데없고…’ 제목의 2011-06-15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면 문학평론가인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서울 동북지역의 문학유산’을 주제로 연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애도의 정치학: 4·19국립묘지 시비의 보수성 비판’을 통해서 시비로 조성된 4·19 기념 시들 상당수가 4·19 정신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을 했다.
그럼 수호천사의 비의 시 선택을 누가 했을까. 시비 조성 당시 시인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되는 인물은 구상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들의 각 개인적인 정치적인 성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윤교수의 주장대로 양쪽 12편 시 중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한 쪽에는 김수영 시인의 ‘푸른 하늘을’,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고은 시인의 ‘돌아오라 영령이여 새로운 영령이여’, 신경림 시인의 ‘4월19일, 시골에 와서’,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진보 시인들의 작품들을 대칭이 되도록 균형 있게 넣었더라면 이념의 대립각도 좁혀지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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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4호선 수유역 하차/지선(마을버스)강북 01. 1119 <수유역 2. 6번 출구>
죽어서 사는 영원한 분들을 위하여/박목월
학우들이 메고 가는 들 것 위에서
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어찌 주검이 되었을까?
우람한 정신이, 자유를 불러올 정의의 폭풍이여,
눈부신 젊은 힘의 해일이여.
하나,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아무리 청사에 빛나기로서니
그것으로 부모의 슬픔을 달래지 못하듯,
내 무슨 말로서 그들을 찬양하랴.
죽음은 죽음 명목(暝目)하라.
진실로 의로운 영혼이여.
거리에는 5월 햇볕이 눈부시고
세종로에서 효자동으로 가는 길에는
새잎을 마련하는 가로수의 꿈 많은 경영이 소란스럽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간 것은 조용해지는 것
그것은 너그럽고 엄숙한 역사의 표정
다만 참된 뜻만이 죽은 자에서 산 자로
핏줄에 스며 이어가듯이,
그리고, 419의 그 장엄한 업적도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빛나는 눈짓으로
우리 겨레면 누구나 숨쉴, 숨결의 자유로운 몸으로,
온 몸 구석구석에서 속삭이는 정신의 속삭임으로
진실로 한결 환해질 자라는 어린 것들의 눈동자의 광채로
이어 흘러서 끊어질 날이 없으리라
<▲ 참배대기 광장 뒤에서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정의의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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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곡(鎭魂曲)/구상
마산 희생자들을 위하여
손에 잡힐 듯한 봄 하늘에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듯이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형제들 넋이여 편안히 가오.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는 쑥대밭 위에
가슴마다 일렁이는 역정((逆情)의 파도
형제들이 틔워 놓은 그 한길 위에
오늘도 자유의 상렬(喪列)이 꼬리를 물었소.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니
운명(運命)보다도 짙은 그 바람마저 버리고
어서 영원한 안식(安息)의 나래를 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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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의자/정한모
그날 밤
너를 기다리던
저녁 밥상이
어머니의 가슴에서
언제까지나
식지 않는 눈물이듯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책가방을 끼고
계단을 내려간
마지막
네 인사
오늘도 너는
빈 의지 위에
착한 그의 눈짓으로
돌아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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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성부
어느 날 밤 내 깊은 잠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아직도 깨끗한 손길로 나를 흔드는 손님이 있었다.
아직도 얼굴이 하얀, 불타는 눈의
청년이 거기 있었다.
눈 비비며 내 그를 보았으나
눈부셔 눈을 감았다.
우리들의 땅을 우리들의 피로 적셨을 때,
우리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사랑을 찾았을 때
검정 작업복을 입었던 내 친구
밤 깊도록 머리 맞대었던 내 친구
아직도 작업복을 입고 한 손에 책을 들고,
말없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아아 부끄러운 내 어깨 위에
더러운 내 세월의 어깨 위에
그 깨끗한 손길로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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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다시 살아/유안진
지금쯤 장년고개 올라섰을 우리 오빠는
꽃잎처럼 깃발처럼 나부끼다가 졌습니다만
그 이마의 푸르던 빛 불길 같던 눈빛은
4월 새잎으로 눈부신 꽃빛깔로
사랑하던 이 산하 언덕에도 쑥구렁에도
해마다 꽃으로 다시 살아오십니다
메아리로 메아리로 돌아치던 그 목청도
생생한 바람소리 물소리로 살아오십니다.
꽃 진 자리에 열매는 열렸어야 하지만
부끄럽게도 아직껏 비어있다 하여
해마다 4월이 오면 꽃으로 오십니다
눈감고 머리 숙여 추모하는 오늘
웃음인가요 울음인가요 저 꽃의 모습은
결 고운 바람결에도 우리 가슴 울먹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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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의 노래/이한직
겨레 爲하여 목놓아 외친 소리
메아리 되어 江山을 뒤흔드네
가시를 들고 횃불을 높이 든 이
그 듯 깊이 받들어 우리 피도 뿌리리
고이 잠들라 同志품에 안겨서
먼동이 트기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목숨을 던져 네가 싸워 이긴 것
우리 거두리 값진 피 식기 전에
이웃 위하여 의로움 위하여
그 젊은 걸었던 일 헛되게는 않으리
고이 잠들라 태극기에 쌓여서
먼동이 트기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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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는 태양/송욱
배운대로 바른대로 노한 그대로
물결치는 대열을 누가 막으랴
주권을 차지한 그대들이여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새로운 지평선에 피를 흘리며
세계를 흔들었다
맨주먹으로―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정의는 오로지 벌거숭이다
어진 피, 젊은 피, 자라는 피다
용감하게 쓰러진 그대들이다
남산도 북악도 모두 보았다
한강이 목놓아 부를 이름들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새로운 수평선에 피를 흘리며
세계를 흔들었다
맨주먹으로―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배운대로 바른대로 노한 그대로
물결치는 대열을
누가 막으랴
막바지서 뛰어난 민족정기여
역사를 차지한 그대들이여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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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魂歌/조지훈
4월혁명희생학도위령제노래
1절
가슴을 치솟는 불길을 터뜨리니
사무친 그 외침이 江山을 흔들었다
鮮血을 뿌리어 우리가 싸워 이긴 것
아! 民主革命의 깃발이 여기 있다
가시밭을 헤쳐서 우리 세운 祭壇 앞에
울며 바친 희생들아 거룩한 이름아!
2절
뜨꺼운 손을 잡고 죽음으로 맹서하던
티없는 그 정성을 하늘도 흐느꼈다.
더운 피를 쏟아내고 네가 죽어 이룬 것
아! 民主革命의 꽃잎이 만발했다
어둠을 밝혀서 네가 세운 共和國을
못 보고 간 동지들아 꽃다운 넋들아!
후렴
고이 잠들라 祖國의 품에 안겨
歷史를 지켜보는 젊은 혼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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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의 힘을 보아라/윤후명
거리에 불붙은 4월의 혼을 보라.
내가 그날 보았던
짓붉은 피의 뜨거운 여울
두 주먹에 정의를 불끈 쥔
거대한 항거를 보라.
헛되이 만용을 부리지 않고
그들은 역사와 힘으로 싸웠다.
핍박을 향하여 내던진
장엄한 희생을 보라.
그 쾌적한 울분이여
핍박을 향하여 온 몸을 바친
아, 우리들의 큰 희생이여
4월 하늘을 갈러낸
그들의 함성을 들어보라.
뜨거운 피의 여울을,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그 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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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掌/김윤식
괴로운 季節의 흐린 하늘 아래서
떨어져 고웁게도 祖國의 품에 안기
앳된 꽃봉오리여.
東녘은 저리 시원스레 밝아오니, 이제사
목놓아 울리라……울리라.
숨막힌 어둠 呻吟도 絶한 밤을 向해 횃불을 들고
뜨거운 靑春의 가슴채로 自由의 종을 난타한
기쁨이여, 자랑이여.
그대 거룩히 뿌린 선형
다시는 어느 누구도 범침 못할
正義의 旗幟여, 永遠히 겨레 위에 펄럭이라.
아아 거룩한 피로서 꾸며진 아름다운 花宛
떨어진 꽃봉오리 멍든 가지에, 다시
爛漫히 꽃이 피는 봄. 봄.
이 꽃밭, 예서 봄을 누릴 가고 오는 사람들이여
白桃花송이 같은 4월의 눈망울로,
아아 壯히도 바로 적은 역사의 글귀
눈부신 太陽으로 우리의 하늘에서
앳된 영혼이여 자랑하라, 빛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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弔 歌/장만영
4·19 젊은 넋들앞에
분노는 폭풍 폭풍이 휘몰아치는 그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유령처럼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던 독재의 꼴을
총탄에 쓰러진 젊은 영혼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여기 새로 만들어 놓은 제단이 있다.
여기 꺼질 줄 모르는 성화가 있다.
여기 비통한 가지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무런 모습으로라도 좋다.
먼 하늘 반짝이는 저 별들처럼 나와
가벼운 속삭임으로라도 좋다.
아아 나에게 슬기로운 역사를 말해주려므나.
슬픔은 독한 술 ―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구나.
이윽고 봄이 오면 꽃도 피겠지 꽃도 지겠지.
그 때마다 나는 새로운 슬픔에 사로잡혀
사랑과 우정을 넘어 통곡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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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박화목
4월은
거칠은 계절풍이 부는 가운데도
굳은 땅을 뚫고 짓누른 돌을 밀쳐 제치며
어린 푸른 싹이 솟구치는 달이다.
사월은
정녕 생명의 외침을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는 달이다.
사람 뒤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고……
그 누가 착하고 어진 우리를 억누르고
한 몸의 영화를 그 속절 없는 부귀를
누리려고 했던가?
썩은 권력은 언제든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을……
한 겨우내 죽은 듯
침묵속에서 살아온 뭇 생명들
이제 활활이 분화처럼 활활히 솟구치나니
아 진정 4월은
부활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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