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패
박이화
화투라면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패를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상 막판에 피박을 쓰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추억에
젖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애도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러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데도
홍도의 순정으로 도무지,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패가 아닌 세상!
잊어야 하는 데도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당신은 분명
내 생애 최악의 똥패인지 모릅니다.
―시집『그리운 연어』(애지, 2006)
몇 사람만 모여도 한국 사람들은 화투판을 벌인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투 사랑은 유별나다. 한때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공항에서까지 화투판을 벌렸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명절이나 애경사 대소사에서 화투는 배고픈 사람들의 음식처럼 늘 판을 벌린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이동이 제한된 초상집에서 날밤을 보낼 때는 화투보다 더 시간을 죽이고 재밌게 날을 새는 방법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스마트 폰속에까지 영역을 넓힌 이 화투를 안 쳐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구나 화투를 한번쯤 쳐보았을 것이고 나 역시 어릴 때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민화투부터 시작해서 육백, 섯다, 원조 고도리까지 입문을 했었다. 여기서 원조 고도리라고 말하는 상대방의 패를 읽지 못하고 그저 짝만 맞으면 때리고 보는 초짜를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비 광만 있으면 상대방의 것을 아무거나 가져올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빗댄, 시대를 조소하는 전두환 고도리도 유행을 했었다. 민화투 시절에는 쭉정이 껍데기에 불과했었던 이름도 없는 서민들의 삶 같은 피딱지 몇 장을 더 만들어 넣어서 즐기는 고도리로 진화를 했다. 모밭에서 무자비하게 뽑혀져나가는 피의 이름을 붙여서 흔들고 나면 그 값어치가 배가 되게 만들어 별 볼일 없는 잡초 같은 서민들의 마음을 짜릿하고 후련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서민들이 이래저래 알게 모르게 받고 있는 불이익의 설움을 권투의 KO펀치처럼 피짝지를 흔들어 한방에 부조리한 사회에 먹이는 것이다. 가끔 도박꾼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서민들의 식후 소화제이기도 한 화투에서 박이화 시인은 똥패의 역설을 본다. 민화투 시절 광하나 빼고는 세 장 모두 쓸모없는 쭉정이라 그야 말로 똥이라 불리었지만 고도리에 와서는 그 신분을 대폭 상승을 시켰다. 고도리 패 7장 중에 광 없이 똥피 3장만 들어와도 죽지 않는다. 이제 똥패는 최악의 패가 아닌 최상의 패가 된 것이다.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별한 사람/김명인 (0) | 2015.06.24 |
---|---|
수화기 속의 여자/이명윤 (0) | 2015.06.22 |
우리 아들 최 감독/최형태 (0) | 2015.06.12 |
소주병/공광규 (0) | 2015.06.09 |
나그네/박목월 (0) | 2015.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