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ㅡ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다리를 다쳐 거의 2년 정도 산을 못 다니다가 2년을 또 혼자서 외롭게 홀로 산을 다닌 적이 있었다. 혼자 산행을 하다보면 의외로 혼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는데 혼자 산행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홀가분하다. 약속도 시간제약도 없으니 코스 변경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도 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나뭇잎 흔들리는 바람 소리, 여러 새가 내는 각양각색의 소리, 골짜기의 물소리도 다 음의 고저와 장단이 있고 낙엽이 떨어지는 장면도 유심히 바라볼 수가 있다. 그 중에 또 하나가 있다면 산행하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날도 삼각산 대동문 구천폭포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으로 하산을 하는 길이었다. 앞에 오십 중반쯤 돼 보이는 여자 두 분이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뒤로 전해져 귀로 들어온다. 연속극에서도 자주 소재로 등장하는 재산의 문제였다. 가까운 친구의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사업하는 자식을 위해 집을 담보라 대출을 하느냐 팔아서 주느냐는 것이었다. 둘의 대화는 안 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지만 만약 당사자라면 어떨까.
우리나라처럼 가족 연대가 끈끈한 유교문화권에서 어버이와 자식은 한 몸이라 막상 내게 닥치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것이 부모로서 마음이 편하다. 아버지의 생애를 소주병에 비유한 공광규 시인의 시 소주병은 자식에게 다 따라주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우리네 아버지의 헐렁한 모습이다. 재산을 반쯤 남겨두고 노후를 대비하여야할 텐데 뻔히 알면서도 그러지를 못하고 다 따라주어 빈병만 남았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밤에 잠도 못자며 남몰래 우는 아버지의 흐느낌을 자식들은 모를 것이다.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똥패/박이화 (0) | 2015.06.19 |
---|---|
우리 아들 최 감독/최형태 (0) | 2015.06.12 |
나그네/박목월 (0) | 2015.06.06 |
씬냉이꽃 / 김달진 (0) | 2015.06.06 |
손님/이성부 (0) | 2015.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