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류시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힌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시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 숲,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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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과연 언제였을까
조윤희
어떤 마음들이
저 돌담을 쌓아 올렸을까
화가 났던 돌, 쓸쓸했던 돌, 눈물 흘렸던 돌,
슬펐던 돌, 안타까웠던 돌, 체념했던 돌,
그런 돌들을 차곡차곡 올려놓았을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을
때로는 발길질에 채였을
어느 순간 차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제자리 지키고 있었을
조금은 흙 속에 제 몸을 숨겼을
심연 속에서 푸른 눈을 뜨고 있었을
그런 것들을 일으켜 세웠을까
저자거리를 헤매이던 마음들이
그 바람 불던 거리에서
자꾸만 넘어지던 마음들이
자기 몸을 세우듯
돌을 쌓아 올려
돌담을 세워
태풍에도 끄떡없는
울타리를 만들었을까
하나하나의 돌멩이들이 채워 논 풍경
그 돌담 밖으로 목련꽃 봉오리 벙그러질 때
그리운 추억의 이름으로 견고해지는 봉인
아름다운 시절을 소망하는 합장하는 손들
ㅡ황인숙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13년 02월 11일)
ㅡ시집『얼룩무늬 저 여자 』(발견, 20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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