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1995)
시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가 있을까. 그것을 믿는 시인들이 있었다. 김남주 시인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노동과 혁명, 자유를 향한 시인들은 감옥도 불사하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저항을 했었다. 이들이 일구어 놓은 고난의 행보가 있었기에 우리가 이만큼의 자유를 누린다고 믿는다. 운명론자들의 말을 빌리면 사람의 길은 정해져있다고 한다. 김남주 시인은 타고난 성향으로 민중시인의 길이 운명이 아니었을까.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50도 안 돼 타계한 것이 못내 아쉽다.
추석쯤이면 만월이고 만월이 무엇을 뜻하는지 연상이 되면 이 시의 제목이 왜 ‘추석 무렵‘이라고 했는지 빙그레 웃음이 나올 법도 하다. “아빠, 여자들은 고추가 없는데 어디로 쉬해” 하는 남자아이의 질문을 남자 아이를 키워본 아빠들은 한번쯤 받았보았을 것이다. 격조 높은? 부자간의 에로티즘의 대화가 추석 무렵 만월을 미소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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