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류가 좋다
김인자
이제 나는 삼류라는 걸 들켜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아니 나는 자진해 손들고 나온 삼류다.
젊은 날
일류를 고집해 온 건 오직 삼류가 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삼류 하면 인생의 변두리만을 떠올리지만 당치 않는 말씀.
일류를 거쳐 삼류에 이른 사람은 뭔가 다르다.
뽕짝이나 신파극이 심금을 울리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편해 오래 입어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낡은 옷 같은 삼류.
누가 삼류를 실패라 하는가.
인생을 경전(經典)에서 배우려 하지 말라.
어느 교과서도 믿지 말라.
실전은 교과서와 무관한 것.
삼류는 교과서가 가르쳐 준 문제와 해답만으로는 어림없는 것
―≪인터넷에서 가져온 시≫
이재무 시인이 삼류 시를 들고 나왔을 때 때 아닌 삼류 비하 논쟁 바람이 불었다. 정겸 시인이 ‘삼류가 본 삼류들 ―이재무 시인의「삼류들」을 읽고’ 반박의 시를 발표했고 복기완 시인은 ‘삼류를 폄하한 어느 시인에게’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이 시가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화은 시인은 ‘들러리 시인에게’, 안주철 시인은 ‘삼류인생’ 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시를 쭈욱 읽어보면 분명 삼류에 대한 조소와 비아냥이 들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은 삼류는 자신이 삼류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없다면 영원한 삼류에 머물겠지만 깨달음이 있어 삼류를 벗어나 일류로 올라가려는 부단한 노력을 할 것이다.
삼류의 수모와 억울함이 없다면 어찌 일류로 올라설 수 있을까. 운이 좋아 짧은 삼류를 거쳐 일류가 된 사람은 모래위에 쌓은 성처럼 비만 오면 바로 모래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삼류을 오래 거치고 일류가 된 사람은 누구보다 삼류의 처지를 이해하고 일류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무 시인의 시는 ‘삼류여! 분발’ 하라는 삼류의 애환과 탁마수련을 하면 일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든지 초보 단계를 지나 숙련된 기술자 장인이 되듯 삼류 없이 일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초보 사냥꾼은 처음부터 호랑이 사자를 잡을 수 없다. 토끼와 여우, 노우 사냥을 거쳐 유명한 포수가 된다. 암벽 클라이머들도 처음부터 높은 암벽인 삼각산 인수봉을 도봉산 선인봉을 무모하게 정복하려고 나서지 않는다. 주변의 낮은 암벽에서 충분한 연습을 한 다음 도전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일류를 목매는데 김인자 시인은 되려 삼류가 좋다고 한다. 일류가 못 되는 삼류의 푸념과 넋두리가 아니라 삼류 속에 따뜻한 인간미와 달관된 인생의 풍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0) | 2016.02.23 |
---|---|
지옥은 없다/백무산 (0) | 2015.10.29 |
해마다 꽃무릇/이규리 (0) | 2015.10.08 |
추석 무렵 /김남주 (0) | 2015.09.23 |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천수호 (0) | 2015.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