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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카톡 좋은 시 322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9. 3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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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좋은 시 322 -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을날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입니다. 여름에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에게 결실을 명하십시오.

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 송이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 것입니다.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그리하여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멜 것입니다.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시초』.문학과사상사. 1957 : 『김현승전집1』. 시인사. 198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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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여백(餘白)을 위한 서정》(1959)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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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입니다. 여름에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에게 결실을 명하십시오.
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 송이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 것입니다.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그리하여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멜 것입니다.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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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김남호

 


주여, 죄를 짓기 좋은 계절이 왔나이다


날로 짧아지는
저 발기부전의 햇볕을 이어서
죄를 도모하게 하소서


난로를 쬐게 하기 위해 손을 만드시고
동동 구르게 하기 위해 발을 만드셨듯이
따뜻한 위로를 만들기 위해 불행한 이웃들을
더욱 더 불행하게 하소서
 

당신이 당신을 위해
죄를 짓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를 위해 지은
빛나는 죄들이 흐려지기 전에 새로운 죄를
짓게 하소서 이 비옥한 시간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계간『문학마다』(가을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