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서울 지하철 시』. 4호선 노원역)
―시집『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냉이꽃
장석주
여기 울밑에 냉이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보라, 저 혼자
누구 도움도 없이 냉이꽃 피어 있다!
영자, 춘자, 순분이, 기숙이 같은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계집애들 이름 같은,
촌스럽지만 부를수록 정다운
전라남도 벌교쯤에 사는 아들 둘 딸 셋 둔
우리 시골 이모 같은 꽃!
냉이꽃
어찌 저 혼자 필 수 있었을까.
한 송이 냉이꽃이 피어나는 데도
움트는 씨앗이 꿈틀거리는 고단한 생명 운동과
찬 이슬,
땅 위를 날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몇 날의 야밤과
피어도 좋다는 神의 응낙,
줄기와 녹색 이파리를 매달고 키워준 햇볕과
우주적 찰나가 필요하다!
―시집『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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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하나가 나기까지는
경종호
비가 오면 생기던 웅덩이에 씨앗 하나가 떨어졌지.
바람은 나뭇잎을 데려와 슬그머니 덮어주고
겨울 내내 나뭇잎
온몸이 꽁꽁 얼 만큼 추웠지만
가만히 있어 주었지.
봄이 되고
벽돌담을 돌던 햇살이 스윽 손을 내밀었더.
그때 땅강아지는 엉덩이를 들어
뿌리가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지.
비가 오지 않는 날엔 지렁이도
물 한 모금 우물우물 나눠주었지.
물론 오늘 아침 학교 가는 길
연두색 점 하나를 피해
네가 ‘팔짝’ 뛰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ㅡ박성우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17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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