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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손택수 - 벚꽃 문식/박경희 - 아버지의 소/이상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7. 4. 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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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ㅡ시집『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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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문신

박경희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운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 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논바닥에 경운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려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뒹굴었으리라

바퀴가 등을 지나간 뒤

울지도 못하고 깨진 창문에 덧댄 비닐처럼

벌벌 떨었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졸았다

경운기와 씨름한 샅바가 불게 물들어

아버지 등에 감겼다, 병원에 가자고

등에 손을 얹은 어머니의 눈물

뒤집어지던 꽃잎 훌러덩훌러덩

등에 새겨졌다   

 

    

 

시집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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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소

 
이상윤

 

 

땡볕 속에서 쟁기를 끄는 소의 불알이

물풍선처럼 늘어져 있다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신지

자꾸만 쟁기를 당겨 그 무게를 어깨로

떠받치곤 하셨다

금세 주저앉을 듯 흐느적거리면서도 아버지의

말씀 없이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

감나무 잎이 새파란 밭둑에 앉아서 나는

소가 참 착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버지는 동네

앞을 흐르는 거랑 물에 소를 세우고

먼저 소의 몸을 찬찬히 씻겨주신 뒤

당신의 몸도 씻으셨다

나는 내가 아버지가 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파킨슨씨병으로

근육이란 근육이

다 자동차 타이어처럼 단단해져서 거동도

못하시는 아버지의 몸을 씻겨 드리면서야 겨우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힘들고 고단한 세월을 걸어오시는 동안

아버지의 소처럼 나의 소가 되신

아버지

아버지가 끄는 쟁기는 늘 무거웠지만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위해서 백합처럼 흰

내 어깨를 내어 드린 적이 없다

입술까지 굳어버린 아버지가 겨우 눈시울을 열고

나를 바라보신다

별이 빛나는

그 사막의 밤처럼 깊고 아득한 길로

아직도 무죄한 소 한 마리 걸어가고 있다

 

 

 

ㅡ시집『하느님도 똑같다』(화암.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