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갈빵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 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무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때를 꼭꼭 챙기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야
―시집『손』(문학세계사, 2011)
-----------------------------------------------------------------------------------------------------
고려시대 국가가 법적으로 허용한 혼인제도가 일부다처제인지 일부일처제인지 논의가 분분하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적어도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더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왕실은 왕건의 예에서 보듯 권력유지와 왕조의 존폐가 달려 있어 왕손이 끊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일부다처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관리는 부인이 있는데도 두 번째 부인을 두어 파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유산 상속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았으며 결혼한 여자식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로 넘어와 유교가 생활의 지침서로 사회곳곳에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의 지위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그야말로 내리막길이었다. 시 속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교사회의 가부장적 아버지이시다. 조선시대처럼 공공연히 막무가내로 애첩을 두는 시대는 지나갔지만 오래도록 이어져온 족보 남성주의 사회에서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다시피 한 여자는 삼종지교로 살수 밖에 없었다. 보쌈이라는 형태의 재혼이 암암히 허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재혼금지나 여자를 홀대하여 아내를 내쫓는 칠거지악이라는 관습으로 여성을 옥죄었기 때문이다.
시 속의 화자는 어머니와 꽃구경하다가 어떤 여자와 팔짱을 끼고 오는 아버지와 딱 마주친다. 이럴 때 아버지는 아내보다 자식 보기가 더 부끄러웠으리라.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자식에게 딱 들켰을 때의 난처함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권위만 가지고는 면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에 먼저 와 시치미를 뚝 떼며 허세를 부리는 아버지를 보고 싸움을 걸기는커녕 되려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신다.
유교적 관습에 길들어진 어머니가 남편의 호통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분고분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화자는 화가 치솟는다. 하지만 어머니인들 왜 속이 없었겠는가. 겉으로는 자식 보기 창피하고 여자로서의 수모를 돌려세우면서까지 어머니가 본분을 다한 것은 오직 가정을 평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여자로서의 본능과 자신의 체면을 모두 버림으로서 가정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용하게 지켜낸 것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 어머니에겐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더 소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와 함께 아버지의 바람끼가 소재가 된 이선이 시인의 운우지정(雲雨之情)과 김나영 시인의 바람의 후예를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바람의 후예/김나영-운우지정(雲雨之情)/이선이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3905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숙 /김사인 (0) | 2017.11.08 |
---|---|
충남 당진 여자 /장정일 (0) | 2017.10.26 |
소주병 / 공광규 (0) | 2017.08.09 |
그리운 악마/이수익 (0) | 2017.08.01 |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0) | 2017.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