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가는 길
정호승
부석사 가는 길로 펼쳐진 사과밭에
아직 덜 익은 사과 한 알 툭 떨어지면
나는 또 하나의 사랑을 잃고 울었다
부석여관 이모집 골방에서
젊은 수배자의 이름으로 보내던 그해 여름
왜 어린 사과가 땅에 떨어져야 하는지
왜 어린 사과를 벌레가 먹어야 하는지
벌레도 살아야 한다고
벌레도 살아야 벌레가 된다고
어린 사과의 마음을 애써 달래며
이모님과 사과 나뭇가지를 받혀주고 잠들던 여름밤
벌레가 파먹은 자리는
간밤에 배고픈 별들이 한입 베어 먹고 간 자리라고
살아갈수록 상처는 별빛처럼 빛나는 것이라고
내 야윈 어깨를 껴안아주시던 이모님
그 뜨거운 수배자의 여름 사과밭에
아직 덜 익은 푸른 사과 한 알 또 떨어지면
나는 부검실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너의 사랑을 잃고 또 울었다
―계간『시선』(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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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시집『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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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1997년>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0』(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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