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시 모음 -도종환/손현숙/나해철/조운/윤재철/이경임...외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집『당신은 누구십니까』(창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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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2』(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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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손현숙
온몸으로 너를 더듬어서
변변한 꽃 한번 피워내지 못했지만
상처 많은 네 가슴
내 손으로 만지면서
담장 끝
너를 보듬어 오르다 보면
그때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은 몰라도
몸으로 몸의 길을 열다 보면
알 길 없던 너의 마음
알 것도 같아
캄캄했던 이 세상
살고 싶기도 하다.
-시집『너를 훔친다』 (문학사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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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나해철
살았을 뿐이다
살아내야 할 시간을
견디며
빈자리에
푸른 잎을 토해냈을 뿐이다
다만
절체절명
사는 일을 위하여
살아냈을 뿐이다
오늘 너는
흰 절벽을 푸르게 덮었다고 하는구나!
시간들이
직벽으로 서 있었는가?
절벽에서 살아왔는가?
절체절명
이 시간
살이 터지며 또 푸른 것
하나 토하자꾸나
-시집『꽃길 삼만리』(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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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조은
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나를 가두었던 것들을 저 안쪽에 두고
내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겠다
지금도 먼 데서 오는 바람에
내 몸은 뒤집히고, 밤은 무섭고, 달빛은
면도처럼 나를 긁는다
나는 안다
나를 여기로 이끈 생각은 먼 곳을 보게 하고
어떤 생각은 몸을 굳게 하거나
뒷걸음질치게 한다
아, 겹겹의 내 흔적을 깔고 떨고 있는
여기까지는 수없이 왔었다
-시집 『따뜻한 흙』(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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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윤재철
앞으로 갈 수 없는 길은
기어오르는 것인가
벽이면 담이면 달라붙어
드디어는 넘어서는 것인가
교육원 붉은 벽돌담에 달라붙어
뻗쳐올라간 너를 보면
우리들의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달라붙는 것임을
달라붙어 소리없이 넘어서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벽은 더 큰 사랑이 되고
더 큰 절망이 되고
절망은 뿌리박고 살며
뿌리박고 넘어서는 일임을 알았다
부정이 긍정이 되고
다시 긍정이 부정이 되는
소리없는 싸움과 삶의 논릴ㄹ
너는 뿌리 같은 네 몸으로 엮어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로부터
보이지 않는 작은 뿌리를 심으며
오는 너는 소문없이 기어오르고 있다.
-신경림 엮음 창비시선 200 기념시선집『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창작과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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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이경임
내겐 허무의 벽으로만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만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하게 취하는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 내리지 않으려 하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 내리는 저 여자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 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침내 벽 하나를
몸속에 집어넣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먹고 있네
아, 지독한 사랑이네
ㅡ시집『부드러운 감옥』(문지, 1998)
ㅡ빅혜경 이광호 엮음『쨍한 사랑 노래』(문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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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전건호
무조건 영역을 넓히는 게 아니었다
상처를 덮는가 했더니
어느 날부터 촉수에 빗물을 찍어
수묵산수를 친다
수직의 화폭에
잎새 하나로 새 한 마리 그려내는
둥글기만 한 저 농담
한때 나도
넓은 땅에 금 긋고
위로 오르려 한 적 있었다
눈물 머금고
한숨을 벼루에 갈아
수묵산수를 친 적 있었다
―시집『변압기』(북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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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물드는
장철문
내 남자라는 말
내 여자라는 말
참 하릴없는 말
개울가
첫 상추 씹히는
돌확에 생고추
얼갈이 겉저리
부득불
광덕보다도 엄장
노힐부득보다도 달달박박
아이는 자라고
담쟁이 물들고
내 여자라는 말
내 남자라는 말
참 불가항력의 말
석벽의
햇살,
담쟁이 잎사귀
맨 처음
짐승이 사람 되던 때의
ㅡ시집『비유의 바깥』(문학동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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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꽃
마종기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느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죄 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 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 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 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시집『이슬의 눈』(문확과지성사, 1997)
-나희덕 엮음『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삼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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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덩굴
임윤식
천애절벽을 오른다
한 치 두 치 기어오르는 자벌레
하늘 끝에 자일을 건다
다시 내려갈 수 없는 외길
바위에 붙어 잠을 잔다
포타렛지도 없는 암벽 야영
손발 끝으로 더듬는 경전經典
얼마나 더 오르면 그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늘 아슬아슬한 길
멀고 먼 면벽수행의 그 길
-시집『나무도 뜨거운 가슴은 있다』(시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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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덩굴의 독법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은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 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은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시집『담쟁이덩굴의 독법』(고요아침,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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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최광임
이제 나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내 살 속 뿌리를 내리고 키돋움하며 오르는 일
처음엔 나의 알맞은 집은 아니었다 어느날
달그락거리는 뼈만 모여 살던 삶
떡잎의 네 사다리가 되어도 좋을 듯 했다 옆에는
흐드러진 능소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다족류의 곤충처럼 셀 수 없는 네 손길은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살을 붙이기도 하고
뼈와 뼈를 맞추기도 하고 살과 뼈 사이
아귀틀림을 다듬기도 하며 나를 지워갔다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월간『시문학』 (2004년 4월호)
강재남
애당초 그럴 마음이 없었다 혼자에 익숙한 나는 나와 닮은 누군가가 적막하고 음울했다 그것은 흡사 곰팡내 나는 책장을 넘겼을 때 맘대로 휘갈긴 삽화를 접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불편한 진실을 만났을 때 맛보았던 비애감 같은 거라 여겨도 좋겠다 물기 많은 그곳에는 같은 색으로 호흡하고 같은 숨을 뱉는 것들로 가득했다 살아간다는 건 허공에 구름집 한 채 마련하는 일이란 걸 갓 구운 구름냄새를 맡는 일이란 걸, 그럴싸하게 몸을 구부리고 내가 걷던 집을 찾아 서성이는 나는 가장 위태로운 존재였다 하나의 길에서 여럿의 생각이 뇌수를 파먹었다 이런 생을 만난 뻔뻔하고 감미로운 기분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을까 햇살이 간간 눈을 찌르곤 했다 햇살을 빠르게 몰아낸 건 눈 밑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서라고, 사실 며칠 전부터 눈 밑이 거뭇하게 죽어가는 걸 보았다 지금쯤 노르웨이에는 빙하가 녹고 있을까 녹아내린 빙하에서 오천 년 전 노르웨이숲고양이였던 나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잠시 아름다웠다 그러는 중에도 나는 나의 손을 잡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협곡에서 협곡으로 오르고 있었다
―월간『시인동네』(2017년 8월호)
담쟁이 여관
이언주
그 낡은 셔츠는 벗어두고 가세요
담쟁이 여관이라 우습게 여기는군요
당신 닮은 계절은 이제 없어요
가벼워진 것이 흩어지고 무거운 기억만 남았나요
가지에 걸려 있는 시계가 힘없이 흘러내리죠
시간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고리가 헐거워졌어요
상처를 주려 껴안은 건 아니에요
당신 없는 지도를 그린다고 마음에 두진 마세요
오래된 여관을 수리하려해요
여름을 지우고 얼굴을 지우고 나를 지우느라
당신 안의 온도를 묻지 못했군요
초침이 한 발 건너 뛸 동안
매듭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스쳐갔는지
지상의 뿌리가 불면으로 붉어지네요
흔들림이 다 빠져나간 걸음으로
앙상한 균형을 맞추려 벽화를 그려요
잡을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는
기억의 고집
곧 불이 꺼질 꺼에요
―시집『그림자 극장』(2015,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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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아버지
배영옥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뒷골목을 맴돌았지.
당신 손바닥에 있을 때만 나는 어린아이였지. 여전히 어린아이고 싶었지. 당신
손바닥에 달린 천 개의 창으로 나는 세상을 보았지. 당신 손바닥이 보여주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아름다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붉은
벽에 서서 바람을 마셨지. 지독한 행복이었지. 당신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그 빛나는
상처를 품고 나는 어른이 됐지. 어린아이고 싶은 어른이었지. 혼자서도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나는 결코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지. 행여 당신
손바닥이 쏟아질까봐,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살았지. 그리운 기척 같은 버릇이었지.
―월간 『시인동네』(2017.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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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문근영
아찔한 저 높이를 건너뛰면
그대에게 닿을 수 있을 까
붉은 벽돌을 층계처럼 오르는
성당 외벽 담쟁이에게
엿보고 싶은 오색유리 안쪽은 성지다
체액은 끈끈해서
첨탑의 시간을 동여매지만
펼친 부채로 흔드는 잎들은
흔들리는 기도에 닿는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움을 흔드는 것
여명의 눈망울쯤에 닿는 끈끈한 발바닥 같은 것
수천 잎들의 포옹에는
구멍 숭숭한 고해성사도 있어
그날의 수직 파문을
땅속뿌리로 받아낸다
궂은 날 피뢰침처럼
-시집『안개 해부학』(고요아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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