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밝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우리들의 양식』. 믿음사. 197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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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禪門)에 들 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분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反骨)의 동지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는 배후가 없다』. 세계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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