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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강의 /안도현 -내 눈을 감기세요/김이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4. 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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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창작강의


  안도현



  내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선배들이 말했죠
  고독한 체하지 마라 고독에 대해 쓰지 마라 제발 고독, 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마라


  나는 40년 넘게 고독을 피해 다녔죠 고독이 다가오면 앞발로 걷어차 버렸고 강가에 갔을 때는 얼음장을 강물에 던져 버렸죠 얼음에 살을 벤 교각이 울더군요


  고독하지 않기 위해 출근을 했고 밥이 오면 숟가락을 들었죠 강연 요청이 오면 기차를 타고 갔고 어제는 대통령선거를 도왔어요 오늘은 다초점렌즈를 바꾸러 안경점에 갔고요 오래 읽지 못한 시집 세 권과 문예지 열댓 권을 새벽에 읽었어요


  멀리 피하면 금세 따라붙고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바뀌더군요 고독한 상점들 앞에서 멧돼지가 트럭을 들이받은 거 메모해두세요 고독하지 않으려고 간판을 내다 걸었다는 것도


  흰 종이를 들여다보느라 밤을 하얗게 새웠죠 나는 눈발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도 모르고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손아귀 속의 새를 놓아주듯이 나를 풀어주는 거죠 고독하게 허공을 밟고 가는 새처럼 구름으로 밥을 말아 먹는 연기처럼


  당분간 전화는 하지 말아주세요 고독해질 때까지
  나는 점점 고독이 그리워져요 내게는 고독한 날이 오지 않아요




ㅡ반년간『시에티카』(2020년 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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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눈을 감기세요

 

  김이듬

 

 

  구청 창작교실이다. 위층은 에어로빅 교실, 뛰고 구르며 춤추는 사람들, 지붕 없는 방에서 눈보라를 맞는다 해도 거꾸로 든 가방을 바로 놓아도 역전은 없겠다. 나는 선생이 앉는 의자에 앉는다. 과제 검사를 하겠어요. 한 명씩 자신이 쓴 시 세 편을 들고 와 내 책상 맞은편에 앉는다. 수강생과 나는 머리를 맞댄다. 어깨를 감싸는 안개가 있고 나는 연달아 사슴을 쫓아가며 총을 쏘는 기분이다. 전쟁을 겪은 후 나는 총을 쏘지 못하게 되었다.

   이건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하잖아요. 이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노인이 내민 시에 칼질을 한다. 깎고 깎여서 뼈대만 남은 조각상처럼 노인은 앉아 있다. 패잔병의 앙상한 뺨을 타고 곧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분노로 불신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아니다. 선생님, 방금 그 작품은 내가 쓴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시를 쓸 수가 없어 유명한 시인의 수상 작품을 필사해봤어요.

   내 머리는 떨어진다. 책상 위에는 첨삭하느라 엉망이 된 유명 시인의 작품이 있다. 그것은 마치 왜 그렇게 비싼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품 브랜드 가방 같다. 노인이 나를 보며 웃지 않으려 애쓴다.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 이름을 가리면 걸작을 못 알아보는 내 식견으로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덤빈 걸까?

 

  

 

―월간『유심』(2013년 5월호)
 ―시집『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