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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 -류시화/조윤희/김사인/김인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5. 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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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류시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힌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시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 숲,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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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과연 언제였을까

 

조윤희 

 

 

어떤 마음들이

저 돌담을 쌓아 올렸을까

화가 났던 돌, 쓸쓸했던 돌, 눈물 흘렸던 돌,

슬펐던 돌, 안타까웠던 돌, 체념했던 돌,

그런 돌들을 차곡차곡 올려놓았을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을

때로는 발길질에 채였을

어느 순간 차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제자리 지키고 있었을

조금은 흙 속에 제 몸을 숨겼을

심연 속에서 푸른 눈을 뜨고 있었을

그런 것들을 일으켜 세웠을까

저자거리를 헤매이던 마음들이

그 바람 불던 거리에서

자꾸만 넘어지던 마음들이

자기 몸을 세우듯

돌을 쌓아 올려

돌담을 세워

태풍에도 끄떡없는

울타리를 만들었을까

하나하나의 돌멩이들이 채워 논 풍경

그 돌담 밖으로 목련꽃 봉오리 벙그러질 때

그리운 추억의 이름으로 견고해지는 봉인

아름다운 시절을 소망하는 합장하는 손들

 

 

 

황인숙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20130211)

시집얼룩무늬 저 여자 (발견, 20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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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연화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숲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시집『어린 당나귀 곁에서』(2015, 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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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김인구

 

 

올빼미가 두 눈을 찌르면 울컥울컥 쏟아지는 눈물

비밀상자를 열 거예요

비밀은 공유가 불가능한 애인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나는

차가운 밤의 어깨를 주무르며 세상 밖으로 나가려

발을 내밀어요, 혀를 내밀어요, 몸을 내밀어요

내밀수록 상처뿐인 나는 오롯이 밤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휘청일수록 무거워지는 생의 무게들

새벽안개 길을 걸어가요

 

꽃의 방점은 힘없이 목을 꺾어

목숨을 난타하는 비루먹은 피 한 방울

담대하게 찍어 입가로 가져가요

입가엔 거짓 피

어둠을 찍어 나르는 빈 부리의 생애가 참을 수 없도록

심장을 쪼아대요

나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오늘 밤 올빼미가 물어오는 달에는

가난한 어둠이 도착할 거예요

어둠의 혀와 바람의 피가 공존하는 양 어깨에

무거운 눈물을 얹고 쏟아지는

파란 비밀을 주워 담을 거예요

곧 잊혀질 내가 만든 세상을 은밀하게 버리고

페허에 꽂힌 빈 두 눈을 만나러 달려갈 거예요

흔적 없이 사라질 거예요

 

 

웹진 시인광장(202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