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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시 모음 -윤곤강/김기림/정한모/복효근/김용택/이진영/김사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5. 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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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윤곤강

 

 

비바람 험살궂게 거쳐 간 추녀 밑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에 맧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 맛이다. 

 

자랑스러울손 화려한 춤 재주도

한 옛날의 꿈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무녀(舞女)처럼 나비는 한숨진다.

 

 

 

ㅡ『시문학3(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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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선문화연구소. 194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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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여행


정한모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나르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아가의 방』. 문원사. 1970 :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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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복효근

 

 

  온전히 펼쳤다가 접는데 한 생애가 다 걸린다는 책이라고 한다 그 한 페이지는 하늘의 넓이와 같고 그 내용은 신이 태초에 써놓은 말씀이라고 한다 벌레의 시간과 우화의 비밀이 다 그 안에 있으나 장주莊周도 그것이 꿈엣 것인지 생시엣 것인지 알지 못하고 갔다 하니 내가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하랴 꽃과 더불어 놀고 꿀과 이슬을 먹고 산다 하는 전설도 있다 지금 내 앞에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저 책을 보고 천박하게도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 한 여자의 생을 떠올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잠시 흐느꼈으니 필시 저 책이 나를 들었다 놓은 것이다 책이 나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 책이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시집『마늘촛불』 (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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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청산 가네

 

김용택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섰네

 

내 맘에 한번 핀꽃은

생전에 지지 않는 줄을

내 어찌 몰랐을까

우수수수 내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사랑에서 돌아선

그대 눈물인 줄만 알았지

내 눈물인 줄은

내 어찌 몰랐을까

날 저무는 강물에 훨훨 날아드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저 산을 날아가는 나비인 줄을

나는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서 있네

 

 

 

시집그 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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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이진영

 

 

나비는

소리없이 난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꽃이 피듯

난다

 

나비는

아우성치지 않고

난다

살며시

제 빛깔로

제 상념으로

 

안으로

안으로

자기 자신에게로만

한없이

깊어져 간다

자지러져 간다

 

熱中

 

그래서 하늘도

바람도

그들의 날갯짓 하나

어쩌지

하는 것이다

 

 

 

계간문예지 게릴라.(200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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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김사인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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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시집교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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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봄을 짜다


김종옥

 


햇빛이 겹겹히 매어놓은 날줄 속으로 나비 한 마리
들락날락 하루를 짭니다

 

찰그락찰그락 어디선가 베틀 소리 들립니다
그가 짜는 능라인지
화르륵 꽃분홍 철쭉이 핍니다
길 끝에서 언덕으로 언덕에서 산으로 오르는
저 나비,
연둣빛 북입니다

 

팽팽하던 날줄이 툭툭 끊어집니다
저 붉은 노을
그가 토혈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속으로
낙타같이 능라를 진 산들이 지고 있습니다

 

 


―계간『애지』(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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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이지옥나비


서안나

 

 

나비표본 상자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외눈이지옥나비 뱀눈그늘나비 높은산지옥나비 에다지옥나비
쐐기풀나비 알락그늘나비 산굴뚝나비 수컷독수리팔랑나비


하룻밤 인연 끝에
날아가려는 사내의 몸에 여자가 핀을 찔러 넣었다
사내의 몸에서 얼핏 좀약 냄새가 난다
정착한 자의 슬픔은
펼쳐진 날개가 기억하는 허공의 깊이 때문이다


설악산 민박집
통유리 창 거실 안에서
허리 아픈 아내를 위해 밥물 맞추는
그는 한쪽 눈을 다친 산 사내
사내는 손등을 넘실거리는 밥물처럼
오래도록 사랑의 금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내의 손이 더듬는 여자의 어깨는
높게 날아오르는 산굴뚝나비를 닮았다
사내는 잃어버린 한쪽 눈 그늘로 슬며시 날개를 펴는
알락그늘나비 뱀눈그늘나비
산정에서 흩어지는 수컷독수리팔랑나비
젖은 사랑을 느리게 날아
날개에 두 눈이 돋은
외눈이지옥나비


유리 상자가 거두어들인 내밀한, 떨림

 

 


―계간『문학 선』(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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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앉았던 자리


한옥순

 

 

이것도 사랑이라고 꽃이 피는구나

 

이것도 이별이라고 꽃이 지는구나

 

이것도 인연이라고 흔적이 남는구나

 

잠시 머무른 자리가 참 고요하구나

 

 

 

-시집『황금빛 주단』(원애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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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고재종

 



 1

 낳자마자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는 삶이기에

 꽃빛 꽃빛 도화꽃빛

 저토록 애절한가

 

 먼 데서 너는 오지만 이내 꽃은 꿈속일 뿐

 

 2

 저 도화나무는 불끈불끈 땅도 잘 붙드는데

 나는 되레 무슨 마음을 팔랑이며

 너 날아간 자취도 없이 날아간 데를 우두망찰한다

 

 나는 여기 있거나

 왜 나는 여기 없는가 

 

 

 

 -웹진 『시인광장』(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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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1년 가을호

-격월간『시사사』(2012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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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노랑나비


한영수
 
 
아리랑
장독대
봉숭아
 
넙데기 할머니가 기억하는 모국어
 
열다섯이었다
비행장에서 일했다
헌병이 큰 칼 차고
끌어가기 전까진
 
착, 착, 착, 군화소리
지금도 들려, 해방은
더 이상 일본 군인이 오지 않는 것
 
소녀가 앉아 운다
노랑나비 온다
날아가지 않는 나비
나비 나비……
 
나비를 나비라고 말할 줄도 모른다




시집눈송이에 방을 들였다』(파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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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리명주나비를 위하여


  이상국



  꽃 사진을 찍으러 산천을 헤매는 선배는 이형이 시인이니까 하는 말인데 이 꽃에는 이 꽃에만 오는 나비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꽃은 오직 그 나비를 위해서 꽃을 피우고 그 나비는 이 꽃을 사랑하다 생을 마치는 거지요 하며 바람 같고 구름 같은 꽃씨 몇 개를 주었다. 그러나 이 커다란 도시 한복판에 있는 손바닥만 한 나의 화단으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나비를 위하여, 그리고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릴 그 꽃을 위하여 봄이 다 가도록 나는 꽃씨를 묻지 않았다.


 

ㅡ계간『시와문화』(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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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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