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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막차/풍경/나무에 기대어/못난 꽃 ―박영근에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2. 2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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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도종환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희미한 불빛으로 발등을 밝히며 돌아온다

내 안에도 기울어진 등받이에 몸 기댄 채

지친 속도에 몸 맡긴 이와

달아올랐던 얼굴 차창에 식히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 이 하나

내 안에도 눈꺼풀은 한없이 허물어지는데

가끔씩 눈 들어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 몇이 함께 실려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초가을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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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도종환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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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기대어

 

도종환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게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 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영혼을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못난 꽃

박영근에게

 

도종환

 

 

모과꽃 진 뒤 밤새 비가 내려

꽃은 희미한 분홍으로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내고 난 뒤의 감당이 안되는

막막함을 안은 채 너는 홀연히 나를 찾아왔었다

민물생선을 끓어 앞에 놓고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상의

신산함을 짚어가는 네 이야기 한쪽의

그늘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고단함을 툭툭 뱉으며

너는 순간순간 늙어가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 밖으로는 삼월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져

몇군데 술자리를 더 돌다가

너는 기어코 꾸역꾸역 울음을 쏟아놓았다

그 밤 오래 우는 네 어깨를 말없이 안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점 혈육도 사랑도 이제 더는 지상에 남기지 않고

너 혼자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빗속에서 들었다

살아서 네게 술 한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찔러넣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똥까지도 다 비우고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못난 꽃,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