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자벌레 시 모음 -김종구/조성국/이상인/강경호/복효근/엄원태/...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0. 8. 12:23
728x90

자벌레

 

김종구

 

 

이게 도대체 몇 자나 되는 거야?

 

궁금증 많은 자벌레

한 자 한 자

세상을 재본다

 

제 몸이 한 자인줄 아는 자벌레가

풀잎 끝에서 오랜만에 허리 펴고

저것도 잴 수 있을까? 허공 바라보다

쟀던 자수 잊어버리고

아래로 내려오며 한 자 두자

다시 재고 있다

 

 

내 나이가 몇이더라?

깜박 깜박 건망증도 심한

자아 벌레

百을 접은 허리 접었다 폈다

열심히 뱃살을 허공에 튕겨본다

 

 

 

―시집『밥숟가락에 우주가 얹혀있다』(시와사람, 20220)

 

------------

자벌레

조성국



이맘때쯤 금당산 떡갈나무 숲길에는
웬 자벌레가 그리도 많은지
몇 발짝 뗄 때마다 어김없이 달라붙곤 했다
눈에 띄지도 않게
투명실낱을 타고 내려와 잣댈 드밀었다
가무잡잡 온몸을 굽혔다 냅다 뻗으며
멧부리지름길이나 기웃거리는 내 꿍꿍이속을 재댔다
한 눈금 두 눈금 곱자를 내밀고
배낭 짊어진 어깨등짝의
크기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잣댈 대보기도 하고
씰룩씰룩 앞서 걷는 매끈한 여자엉덩이를 얄궂게 더듬거나
은근슬쩍 젖가슴크기를 가늠해보다 들켜
얻어맞기도 하였다
어스름 즈음에는 불끈 선 아랫도리조차 보이지 않는
배불뚝이 중년의 사내가
부도방 찍힌 약속어음을 찢어발기며
떡갈나무에 밧줄 내걸고 목을 맺다가
염치없는 양 도망치듯 숲길을 벗어나게 했던 자질이,
자질하며 귀엣말처럼 무슨 말을 했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파른 산행의 발걸음에 무심코 짓밟힌
앳된 산자고꽃대가 안간힘 써 허리를 곧추세우는 걸
언뜻 지켜보며 괜한 궁금증을 자아냈다고
스스로 통박을 놓기도 하였다



ㅡ계간『신생』(2017년 6월호)

 

-------------

자벌레

 

이상인

 


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


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


가끔씩 고갤 좌우로 흔든다.


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


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


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내려 간다.


나는 아직 잴 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


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

 

 

-시집『UFO 소나무』(황금알, 2012)

 

---------------

자벌레


강경호

 


자벌레는 땅을 측량하지 않는다
부동산투기를 하지 않는다
묵묵히 길을 간다


오체투지를 하다가
남들 안 보는 나무 그늘에서도
허투루 그냥 걸어가지 않는다


부처를 향해 가지 않으며
천국을 꿈꾸지 않는다
연약한 그의 몸엔 사리 같은 건 없다
헐벗은 지구의 옷
초록색 실로
한 땀 한 땀 바느질 한다.

 


-『2010 한국카톨릭詩選』(카톨릭신문사, 2010)
-시집『휘파람을 부는 개』(시와사람, 2009)


--------------------------
자벌레


복효근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이다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시집『마늘촛불』(애지, 2009)


-----------------
자벌레

 

임연태

 

 

포탈라 궁을 향해 오체투지하며
길에서 한 생을 마친 사람
오늘은, 연둣빛 법의(法衣) 입고
봉선사 설법전 난간에서
그때 못 다한 절인 듯
저토록 지극하게
생멸(生滅)의 간격 재고 있다.

 

 

 

-시집『청동물고기』(황금알, 2010)

 

-------------

자벌레

 

김일태


한 마리
웃 옷 명치부근에 붙어
기어가고 있다

무량한 세상
언제 다 재겠냐고

웃지 마라
너희들 가슴팍은 몇 뼘이냐 되냐


-계간『시와시학』(2003년 겨울호 신작소시집)

 

---------------

자벌레, 자벌레가

 

변종태

 

 

오일시장에서 열 개에 오백 원 주고 사 왔다는,

칠순 노모가 심어놓은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십 배는 됨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다가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온몸으로 세상을 재던 시절이 있었지

온몸으로 세상의 넓이를 재느라

어미의 생을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이의 상처를 갉아먹기도 하면서,

아, 나도 노모(老母)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비친 욕실,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 선하다.

 

 

 

―시집『시와경계』(2009년 봄호 소시집)

 

-----------------

자벌레는 세계의 그늘을 잰다

 

권현형

 

 

원곡동, 스패니시 할렘, 명왕성

힙합 가수는 자신을 탕진했노라고 랩으로 고백하고

 

자벌레는 몸으로 느릿느릿 세계의 그늘을 잰다

 

검은 그림 속에 연두 그림

연두 그림 속에 분홍 그림

분홍 그림 속에 자꾸 멀리 가는 사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흐느낌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모두를 위한 것,

깍두기를 먹다가도 너무 모질다고 말하던 사람

 

나중에 다시 볼 사람

나중에 다시 들을 음악

 

나중에, 나중에, 라고 말하는 대신

저 산 위에 배를 띄우겠다

비탈진 곳에 구름과 비가 섞여 있다

 

검은 그림 속에 연두 그림

연두 그림 속에 분홍 그림

분홍 그림 속에 검은 기억은 그림자까지 모질게 살아 있다

 

 

 

―시집 『포옹의 방식』(문예중앙, 2013)

 

---------------

자벌레구멍

 

위선환

 

 

쳐다보니

떡갈나무 잎사귀에

자벌레가 붙어 있습니다

그저 그러는구나 했다가 한참 뒤에 다시 보니

자벌레는 없고

가늘게, 길다랗게, 그리고 파랗게,

딱 자벌레만한 구멍이

떡갈나무 잎사귀에 뚫려 있습니다

자벌레가 하늘 되는 방법이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라면서

자벌레가 뚫어놓은 구멍을

찬찬히 봐두라고,

비좁지만 이미 자벌레가 그랬듯이

조심해서 몸을 끼워 넣고는 재빠르게

뒤로 빠져 나가버리라고, 그것이

방법이라고

 

 

 

―시집『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현대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