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도종환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희미한 불빛으로 발등을 밝히며 돌아온다
내 안에도 기울어진 등받이에 몸 기댄 채
지친 속도에 몸 맡긴 이와
달아올랐던 얼굴 차창에 식히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 이 하나
내 안에도 눈꺼풀은 한없이 허물어지는데
가끔씩 눈 들어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 몇이 함께 실려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초가을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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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도종환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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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기대어
도종환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게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 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영혼을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못난 꽃
―박영근에게
도종환
모과꽃 진 뒤 밤새 비가 내려
꽃은 희미한 분홍으로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내고 난 뒤의 감당이 안되는
막막함을 안은 채 너는 홀연히 나를 찾아왔었다
민물생선을 끓어 앞에 놓고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상의
신산함을 짚어가는 네 이야기 한쪽의
그늘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고단함을 툭툭 뱉으며
너는 순간순간 늙어가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 밖으로는 삼월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져
몇군데 술자리를 더 돌다가
너는 기어코 꾸역꾸역 울음을 쏟아놓았다
그 밤 오래 우는 네 어깨를 말없이 안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점 혈육도 사랑도 이제 더는 지상에 남기지 않고
너 혼자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빗속에서 들었다
살아서 네게 술 한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찔러넣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똥까지도 다 비우고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못난 꽃,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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