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 겨울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금방앗간
그 아랫말 마찻집 사랑채에
우리는 쌀 너 말식에 밥을 붙였다.
연상도 덕대도 명일 쇠러가 없고
절벽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은 지겨워
종일 참나무불 쇠화로를 끼고 앉아
제천역전 앞 하숙집에서 만난
영자라던 그 어린 갈보 애기를 했다.
때로는 과부집으로 물려가
외상 돼지 도로리에 한몫 끼였다.
진눈깨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보름께면
객지로 돈벌이 갔던 마찻집 손자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와 그를 위해
술판이 벌어지는 것이지만
그 술판은 이내 싸움판으로 변했다.
부락 청년들과 한산 인부들은
서로 패를 갈라 주먹을 휘두르고
박치기를 하고 그릇을 내던졌다.
이 못난 짓은 오래가지는 않아
이내 뉘우치고 울음를 터뜨리고
새 술판을 차려 육자배기로 돌렸다.
그러다 주먹들을 부르쥐고 밖으로 나오면
식모살이들을 가 처녀 하나 남지 않은
골짜기 광산부락은 그대로 칠흑이었다.
쓰러지고 엎어지면서 우리들은
노래를 불러댔다. 개가 짖고 닭이
울어도 겁나지 않는 첫새벽
진눈깨비는 이제 함박눈으로 바뀌고
산비탈길은 빙판이 져 미끄러웠다.
08.01.01 밤 11시 33분
29
3월 1일 전야前後
마작판에서 주머니를 털린 새벽.
거리로 나서면 얼굴을 훑는 매운 바람.
노랭이네 집엘 들러
새벽 댓바람부터 술이 취한다.
술청엔 너저분한 진흙 묻은 신발들.
아직 해가 뜨지 않는 새벽인데도
장꾼들은 두려워 말소리를 죽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이
떨면서 마구 소리를 지른다.
비틀대며 냉방으로 돌아가면
가난과 두려움으로 새파래진 얼굴을 들고
아내는 3월 1일이 오기 전에
이 못난 고장을 떠나자고 졸라댄다.
08.01,01/밤 11시 40분
30
동면冬眠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궂은 날만 빼고 아내는 매일
서울로 새로 트이는 길을 닦으러 나가고
멀건 풀죽으로 요기를 한 나는
버스 정거장 앞 만화가게에서 해를 보냈다
친구들은 떼로 몰려와내게 트집을 부렸다
거리로 끌어내어 술을 퍼먹이고
갈봇집으로 앞장을 세우다가도
걸핏하면 개울가로 몰고 가 발길질을 했다
곧잘 아내는 내 여윈 목을 안고 울었다
그 봄엔 유달리 흙바람이 차서
아내는 온몸이 시퍼렇게 얼어 떨었지만
나는 끝내 만화가게에서 해를 보내며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지 않았다
08.01.01/ 밤 11시 45분
----------------------------------------------
나는 산골 탄광촌에서 자라 농촌에 데해 잘 몰라요.
그래서 볏가리 낟가리 논에 관한 단어들이
나오면 잘 못 알아 들어요.
낯선 용어에 대한 불안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생경하지요.
그러면서도 낯선 곳을 동경하는 것은 단순 호김심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2008 필사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정희 시집....일곱째거리-통일마다 /끝 (0) | 2021.01.20 |
---|---|
신경림 시선집 1.....31.32.33 (0) | 2021.01.20 |
고정희 시집...여섯째거리--대동마다/1.2.3.4 (0) | 2021.01.20 |
고정희 시집...여섯째거리--대동마다/1.2.3.4 (0) | 2021.01.20 |
신경림 시선집 1....25.26.27 (0) | 2021.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