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31.32.33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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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실명失明



해만 설핏하면 아랫말 장정들이
소주병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창문을 때리는 살구꽃 그림자에도
아내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막소주 몇잔에도 우리는 신바람이 나
방바닥을 구르고 마당을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씩
미치기 시작했다. 소리내어 울고
킬킬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는
아내를 끌어내어 곱사춤을 추켰다.
참다 못해 아내가 아랫말로 도망을 치면
금세 내 목소리는 풀이 죽었다.
윤삼월인데도 늘 날이 궂어서
아내 찾는 내 목소리는 땅에 깔리고
나는 장정들을 뿌리치고 어느
먼 도회지로 떠날 것을 꿈꾸었다.

08.01.03/밤 1시 13분

32
귀로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고 거칠다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풀어져
어둠이 덮는 가난 속을 절뚝거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뉘우지고 다시
맹세하지만 그러다 서로 헤어져
삽짝도 없는 방문을 밀고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음성은 통곡이 된다

08.01.03/밤 1시 16분

33
산읍
일지山邑 日誌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박군은 감방에서 송형은
병상에서 나는 팔을 벤
여윈 아내의 곁에서
우리는 서로 이렇게 헤어져
지붕 위에 서걱이는
눈소리만 들을 것인가
납북된 동향의 시인을
생각한다 그의 개가한 아내를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아
연탄을 사고 술을 마시고
숙직실에 모여 섰다를 하고
불운했던 그 시인을 생각한다
다리를 저는 그의 딸을
생각한다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
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08.01.03/밤 1시 22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시 쓰는 작법이나 스타일이나
새로운 것을 없고 계속해서 거의
비슷합니다.

사실 저는 서정주나 유치환 같은 시인을 알 때 신경림 시인은
몰랐었습니다.
문체(시어)도 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아
이쯤에서 중단을 하고 서정주 시선집을 사볼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이왕 시작을 했으니 몇 달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다 해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