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40.41.42.42.44.45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5:33
728x90

40
묘비墓碑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가는 제 가냘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08.01.04/아침 9시 24분

41
심야深夜

1

쓸쓸히 죽어간 사람이여.
산정에 불던 바람이여.
달빛이여.
지금은 모두 저 종 뒤에서
종을 따라 울고 있는 것들이여.

이름도 모습도 없는 것이 되어
내 가슴속에 쌓여오고 있는 것들이여.

2

어느날엔가
나도 그들과 같은 것이 되어
그들처럼 어디론가 쓸쓸히 돌아가리라. 그날
내가 가서 조용히 울고 있을
어느 호수여.

누군가의 슬픈 가슴이여.

08.01.04/아침 9시 26분

42
유아幼兒

1

창 밖에 눈이 쌓이는 것을 내어다보며 그는
귀엽고 신비롭다는 눈짓을 한다. 손을 흔든다.
어린 나무가 나무 이파리들을 흔들던 몸짓이 이러했다.

그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까닭을, 또 거기서 아름다운 속삭임들이 들리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 - 충만해 있는 한 개의 정물이다.

2

얼마가 지나면 얼마라는 말을 배운다. 그것은 그가
엄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다.

꽃, 나무, 별,
이렇게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배워가면서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하나하나 잃어버린다.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

3

그리하여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이면 그는
어느 소녀의 생각에 괴로워도 하리라.

냇가를 거닐면서
스스로를 향한 향수에 울고 있으리라.

08.0105/아침 9시 6분
어린아이는 세상을 배우면서 또 다른 것들을 잃어가지요. 얼마라는 말을 배우면서
엄마라는 말의 비밀을 잃어버리고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배운 꽃과 나무와 별의
비밀도 잃어버립니다.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완전한 한 사람이 될지 몰라도 그 날은 또한 모든
비밀을 모두 잃어버리는 날이네요.

그런데 감상을 하다보니 이 시가 1. 2, 3으로 되어 있는데 2 까지만 있고 3은
없는 것이 어떨까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를 보면서 이렇게 문득 떠오른 생각처럼 시 쓰는 것도 그렇게 찾아오면
좋겠네요.



43
死火山, 그 山頂에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불길이 되어 탄다.
천지가 흔드는 폭음으로 어느 날은
지각을 뚫고 솟구쳐 오른다.
이칠 듯한 희열에 아무것도 그는 모른다.
불길이 하늘 높이 솟구쳐 떨어지며
흘들리는 산.
초목은 모두 불이 되어 나고
바위는 녹아 물이 되어 흐른다.
-만년이 지난다. 십만년이 지난다.

보아라. 지금
불을 뿜던 분화구에는
손끝이 얼어붙도록 차고 푸른 물이 고였다.
키 작은 고산식물들이 총총히 들어선 산정엔
등산객들이 캠프를 하고 간 자리.
간간이 들리는 적적한 산해소리가 귀에 설다.
멀리 보이는 강과 바다와 허허벌판.
들어보라. 저 바람소리.

나도 이제 불을 뿜던 분화구처럼 가슴을 헤치고
온통 바람소리로만 가슴을 채우리라.

슬픈 일이 있어도 좋다. 아아 지금 내게 무슨
괴로울 것이 있어도 좋다.

08.01.05/아침 9시 32분

44
밤새

느티나무 밑을 도는
상여에 쫓기다가 꿈을 깬다
문득 새소리를 들었다

억울한 자여 눈을 뜨라
짓눌린 자여 입을 열라

원귀로 한치 틈도 없는
낮은 하늘을 조심스럽게 날며
저 밤새는 슬프게 운다
상여 뒤에 애처롭게 매달려
그 소년도 슬프게 운다

08.01.05/아침 9시 34분

45
달빛

밤늦도록 우리는 지난 애기만 했다
산골 여인숙은 돌광산이 가까운데
마당에는 대낮처럼 달빛이 환해
달빛에도 부끄러워 얼굴을 돌리고
밤 깊도록 우리는 옛날 애기만 한다
누가 속고 누가 속였는가 따지지 않는다
산비탈엔 달빛아래 산국화가 하얗고
비겁하게 사느라고 야윈 어깨로
밤새도록 우리는 빈 애기만 한다

08.01.05/아침 9시 36분


신경림의 옛날 시를 보고 있으니
옛날 속을 거니는 것 같아요.

어릴 적 생각이 나기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