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34.35.36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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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벽지僻地

살얼음이 언 냇물
행길 건너 술집
그날 밤에는 첫눈이 내렸다
교정에 깔리던 벽지의
좌절

숙직실에 모여
묵을 시켜먹고
십릿길을 걸어
장터까지 가도
가난하고 어두운 밤은
아직도 멀어

서울을 애기하고 그
더러운 허영과 부정
결식아동 삼십프로
연필도 공책도 없는 이
소외된 교실

잊어버리자 우리의
통곡

귀로에 깔리던
벽지의 절망
그날 밤에는 첫눈이 내렸다

08.01.03/아침 7시 54분

35
산읍기행山邑紀行

장날인데도 무싯날보다 한산하다
가뭄으로 논에서는 먼지가 일고
지붕도 돌담도 농사꾼들처럼 지쳤다.

아내의 무덤이 멀리 보이는
구판장 앞에서 버스는 섰다.
나는 아들놈과 노점 포장 아래서
외국자본이 만든 미지근한 음료수를 마셨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친구들의 눈은
왜 이렇게 충혈돼 있을까.
말이 없다. 그저 손을 잡고
흔들깁만 한다. 그 거짓된 웃음.

돌과 몽둥이와 곡갱이로 어지럽던
좁은 닭전 골목. 농사꾼들과
광부들의 싸움질로 시끄럽던 이발소 앞.
의용소방대원들이 달음질치던 싸전 길.

장날인데도 어디고 무싯날보다 쓸쓸하다.
아내의 무덤을 다녀가는 내 손을
뺐뺏한 손들이 잡고 놓지를 않는다.


08.01.03/아침 8시8분
무싯날 - 장날이 아닌 날/예삿날.
싸전 - 장거리나 큰 도시에서 쌀을 많이 벌여놓고 파는 가게.

36
시외버스 정거장

을지로 육가만 벗어나면
내 고향 시골냄새가 난다
절퍽이는 정거장 마당을 건너
난로도 없는 썰렁한 대합실
콧수염에 얼음을 달고 떠는 노인은
알고보니 이웃 신니면 사람
거둬들이지 못한 논바닥의
볏가리를 걱정하고
이른 추위와 눈바람을 원망한다
어디 원망할 게 그뿐이냐고
한 아주머니가 한탄을 한다
삼거리에서 주막을 하는 여인
어디 답답한 게 그뿐이냐고
어수선해지면 대합실은 더 썰렁하고
나는 어쩐지 고향 사람들이 두렵다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을지로 육가행 시내버스를 탈까
육가에만 들어서면
나는 더욱 비겁해지고



08.01.03/아침8시 17분

*볏가리 -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더미
볏가을 - 익은 벼를 거둬들이는 일/볏갈
낟가리 -



이 시 8행과 9행
'거둬들이지 못한 논바닥의
볏가리를 걱정하고'

9행 볏가리를 걱정하고 했는데
사전에 찾아보니 볏가리는 볏단을 쌓은 더미이고
볏가을이 익은 벼를 거둬들이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노인이 걱정하는 것은 볏가리가 아니고
볏가을이 맞지요.

당시 농촌에서 그렇게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전적인 의미가
맞다면 신경림 시인이 단어의 의미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