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46.47.48.49.50.51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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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강江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꽃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들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08.01.05/아침 9시 39분

47
그 여름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꽃과 춤을 불러오고
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 오고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

08.01.05/아침 9시 41분

48
전설傳說

늘 술만 마시고
미쳐서 날뛰다가
마침내 그 녀석은 죽어버렸다

내가 살던 고향 동네로
넘어가는 그 고갯실
서낭당 고목나무

빨갛고 노란 헝겊을
걸어놓고
귀신이 되어 도사리고* 앉았다

안개가 낀 자욱한 여름밤
원통해서 원통해서
그 녀석은 운다

원통해서 원통해서
고목나무도 운다 그 녀석은
되살아나서 도사리고 앉았고

08.01.06/ 밤 12시 55분

*도사리다 - 1.두 다리를 꼬부려서 각각 다른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괴고 앉다.
2.팔다리를 함께 모으고 몸을 옹크리다

498
추방追放

1
우리 조상들에 대한
에른스트 오페르트 그의 생각은 옳았다
강언던에 모여선 헐벗은
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를 미워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패롱의 동료들을 쇠전에서 찢어죽이고
또 그로 하여 다섯 밤 다선 낮을
플을 뜯어먹고 살게 한
그 못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
오페르트여 우리는 안다

2
이 어둠 속에서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라
강요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거짓을 참이라 우겨대는 그들은 누구인가
거리는 온동 어둠으로 덮여 있지만
오페르트여 당신을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라는 저
억지 속에서 페롱의 후예들은
다시 화륜선에 실려 이 땅을 떠나고 있다
누구인가 그들을 내어몰고 있는
그자들은 누구인가

08.01.07/ 밤 1시 5분

50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질척이는 골목의 비린내만이 아니다
너절한 욕지거리와 싸움질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깊은 가난만이 아니다
좀체 걷히지 않는 어둠만이 아니다

팔월이 오면 우리는 들떠오지만
삐꺽이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아니면 소줏집 통걸상에서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외국의 어느
김빠진 야구경기에 주먹을 부르쥐고
미치광이 선교사를 따라 핏대를 올리고
후진국 경제학자의 허풍에 덩달아 흥분하지만
이것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쓸개 빠진 헛웃음만이 아니다
겁에 질려 야윈 두 주먹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서로 속이고 속는 난장만이 아니다
하늘가지 덮은 저 어둠만이 아니다

08.01.08/아침 8시 55분

51
친구여 네 손아귀에

1
창동애비가 죽던 날은 된서리가 내렸다
오동잎이 깔리 기름틀집 바깥마당
그 한귀퉁이에 그의 시체는 거적에 싸여 뒹굴고
그의 아내는 그의 옆에 실신해 누웠다

창돌이와 나는 팽이를 돌렸다
무서워서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싸전 마당에서 저물도록 팽이만 돌렸다

2
소주잔을 거머쥔 네 손아귀에 친구여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안다
상밥집에서 도는 선술집에서다시 만났을 때
네 눈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을 나는 보았다
네 편이다 아무리 우겨도
믿지 않는 네 어깻짓을 나는보았다

거적에 싸인 시체 위에 떨어진다 오동잎
친구여 나는 보았다

08.01.08/아침 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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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시의 표현기법보다 시의 미학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하는데
신경림의 시에서는 풍자가 있을 뿐
표현의 세련됨이나 시적 미학은 없지요.

단조로우나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는 것처럼 조근조근 풀어나가는
우리들의 삶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다 그런 것이지요.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어느 곳이든 일할 곳이 있지만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할 데가 마땅치 않았지요.
그래도 할일없이 갈보를 희롱이나 하고
또 그러다보면 연민이 생기고
자기자신도 초라하고
다 예전의 우리들의 삶이 이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