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52.53.54.55.56.57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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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비탈진 골목길
비겁하지 않으리라 주먹을 쥐는
내 등뒤에서 나를 비웃고 있다
그 밤 나는 계집의 분냄새에도 취했었지만
1871년의 블랑키스를 애기하고
억울하게 죽은 내 고향 친구를 애기했다
누군가 나를 꾸짓고 있다
잠든 아이들 옆에서 오래도록 몸을 뒤채는
아아 그리하여 저
골목을 쓰는 바람소리에 몸을 떠는
내 등뒤에서 나를 꾸짓고 있다
오늘밤 그 무덤 위에 눈이 내릴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08.01.08/ 아침 9시 1분


53
어둠 속에서

빗발 속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바람 속에서도 곡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인데도 거리는 새파랗게 얼어붙고
사람들은 문을 닫고 집 속에 숨어 떨었다

지나간 모든 죽음이 헛된 것이었을까
아이놈을 데리고 찾아간 산속
풀과 바위에는 아직도 그해의 핏자국이 보였다
한밤중에 원귀들이 일제히 깨어
통곡으로 어두운 골짜기를 덮었으나

친구여 나는 무엇이 이렇게 두려운가
답답해서 아이놈을 깨워 오줌을 누이고
기껏 페르 라셰즈 모지으 마지막 총소리를
생각했다 허망한 그 최초의 정적을

보라 보라고 내 눈은 외쳐대고
들으라 들으라고 내 귀는 악을 썼지만
이 골짜기에 얽힌 사연을
안다는 것이 나는 부끄러웠다

험한바위 설기에 친구를 묻고
흙묻은 손을 비벼 털고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힘을 알았다 한
그 지나간 모든 죽음이 헛된 것이었을까

꽃잎에서도 이슬방울에서도
피의 통곡이 들리는 한여름밤
친구여 무엇이 나는 이렇게 두려운가


08.010.08/ 아침 9시 8분

54
산역山驛

여관방 미닫이를 석탄가루가 날아와 때렸다
철길 위에 삐걱거리는 탄차소리에 눈을 뜨면
거기 사슬에 묶인 친구들의 손이 어른대고
좁은 산역은 날이 새어 술렁거렸다

이 외진 계곡에 영 봄이 오지 않을리라는
뜬소문만 전봇줄에 엉겨붙어 윙윙대는
작은 변전소 옆 허술한 어전 골목

본바닥 젊은이들은 눈이 뒤집혀 나그네를 뒤졌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내 귀에

번개가 머리칼을 태우고 천둥이 귀를 찢어도
겁내지 말라 외쳐대는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제 저 싸늘한 별이 우리 편이 아니더라도

08.01.08/ 아침 9시 15분

55
대목장

살이 있는 것이 부끄러워
내 모습은 초췌해간다

뜰기운 수려선 연변
작은 면소재지
추둔 대목장

저 맵찬 바람소리에도
독기 어린 수군댐에도
나는 귀를 막았다

아는 사람을 찾아
왼종일 장거리 돈다

08.01.08/ 아침 9시 16분

56
해후邂逅

그 여자는 내 얼굴을 잊은 것 같다
정거장 앞 후미진 골목 해장국집
우리는 서로 낯선 두 나그네가 되어
추탕과 막걸리로 요기를 했다

그 공사장까지는 백리라 한다
가을비에서는 여전히 마른풀내가 나고
툇마루에 모여 음담으로 날궂이를 하던
버들집 소식은 그 여자도 모른다 한다

변전소에 직공으로 다니던
그 여자의 남편은 내 시골 선배였다
벅구를 치며 잘도 씨름판을 돌았지만
이상한 소문이 떠돌다가 과부가 된
그 여자는 이제 그 일도 잊은 것 같다

메밀꽃이 피어 눈부시던 들길
숨죽인 욕지거리로 술렁대던 강변
절망과 분노에 함께 울던 산바람

우리가 달려온 길도 그 노랫소리도
그여자는 이제 다 잊은 것 같다
끝내 낯선 두 나그네가 되자고 한다
내려치는 비바람 그 진흙길을
나 혼자서만 달려나가라 한다

08.010.08/ 낮 11시 58분
요기 - 시장기를 면할 정도로 음식을 조금 먹음
우리말로는
볼가심 - 적은 음식으로 시장기를 가시는 일
입씻이 - 입씻김으로 금품을 줌. 또는, 그 금품/뇌물에 해당
입씻김 - 다른 말을 못하도록 금품을 주는 일
*해후邂逅 - 해후상봉邂逅相逢 준말/우연히 서로 만남


57
동행同行

그 여자는 열살 난 딸 애기를 했다
그 신고 싶어하는 흰 운동화와
도시락 대신 싸가는 고무마 애기를 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왔다
명아주 깔린 주막집 마당은 돌가루가 하얗고
나는 화장품을 파는 그 여자를 향해
실실 헤픈 웃음을 웃었다

몸에 밴 그 여자의 비린내를 몰랐다
어물전 그 가난 속에 얽힌 애기를 나는 몰랐다

느린 벽시계가 세시를 치면
자다 일어난 밤대거리들이 지분댔다
활석광산 아래 마을에는
아침부터 비가 오고
우리는 어느새 동행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그러나 우리는 서로 묻지 않았다

08.01.08/ 낮 4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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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내는 시들은 1975년에 나온
농무 라는 시집에 들어 있는 시를 시선집으로
엮은 것이지요.


1975년 30년전에 나온 시집이니까
아무래도 현실과는
많이 맞지는 않지요.

그러나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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