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고정희 유고시집...13.14.15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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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밥과 자본주의
푸에프토 갈레라 쪽지

히브리의 갈릴리 해변이 생각나는 푸에르토 갈레라 섬에는 메뚜기와 석청으로 밥을 삼으며 예루살렘 사발통문을 광고하는 세례 요한은 없지만, 그러나 산꼭대기까지 야자나무 잎사귀로 햇빛을 가리는 산들과 살아 소리치는 섬들이 밤낮으로 풀어놓는 파도소리와 그 속에 엎드려 사는 어민들이 있습니다

섬사람들은 아침마다 먼바다로 나가 망망한 대해 창파 한가운데 거기 푸르고 깊은 물살 위에 부챗살 같은 어망을 던지고 건져올리며 무지갯빛 비늘을 가진 고기떼와 함께 무공해 기쁨 무공해 슬픔 무공해 밥을 어획고에 저장합니다 그들이 목숨을 기대는 이 무공해 기쁨 무공해 슬픔 무공해 밥의 어획장에 누가 재앙을 밀반입시킬 수 있을까요, 어느 아침 나는 이곳에서 서구대륙의 에이즈 파도가 엄청난 부피로 하선되고 하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이즈 혈청을 휴대한 백인 남자들, 배 위에 배 하나를 더 얹은 듯한 배불뚝이 남자들이며 백발이 성성한 늙다리 남자들이 젊고 가날픈 아시아 여자들을 사타구니에 끼고 합법적인 윤간을 즐기는 동안, 아아 아시아 남자들은 문 밖에서 담배 같은 희망 혹은 희망 같은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문득 사이판이나 오끼나와 섬으로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아시아 여자들이 남긴 비명소리, 아슬아슬한 절벽에 몸을 던지며 최후의 일성으로 외쳤다는 어머니 ∼ 어머니 ∼ 하는 울부짖음을 푸에프토 갈레라 파도소리 속에서 들었습니다

08.01.10./낮 2시 18분



14
밥과 자본주의

우리를 불지르고 싶게 하는 것들

대형백화점에 진열된 갖가지 유니폼을 보면 나는 슬며시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시대별 유니폼 속에 단정히 개켜넣은 밥 - 이데올로기, 그 속에 스며 있는 우아한 노예 패션, 삐까번적 포장한 프린세스 라인이며 로열박스 리본에 후르르르르 불을 당겨 이열치열 불마당 만들고 싶어집니다
하인들이 열고 닫는 대문을 보면 나는 이심전심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우람한 대문으로 넘나드는 명부전의 자부심과 높다랗게 치솟은 쇠창살, 난공불락 이기주의 담쟁이 덩굴에 화르르르 불을 당겨 우리의 소원은 평등......꿈에도 소원은 분배...... 해방의 모닥불 만들고 싶어집니다
튼튼하게 정돈된 거짓말이 거룩하게 쏟아지는 벼슬아치 입을 보면 나는 확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거짓말의 높이를 상징하는 고관대작의 사다리, 재벌과 축복을 협상하는 권력의 위패, 그 앞에 꿇어앉은 산을 옮길 만한 어깨들의 요란스런 충성기도와 영원히 숙청하지 않으면서 숙청이란 낱말에만 광란하는 저 시뻘건 부정부패 푸닥거리에 우럴럴럴 까꿍! 까꿍! 불을 당겨 희망의 불쏘시개 만들고 싶어집니다
아아 위를 배아프게 하는 것을 보면 나는 불현 듯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너무 많은 땅 문서 너무 많은 돈문서를 보면 나는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차지한 너무 큰 하는 너무 위대한 밥그릇을 보면 나는 불지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생산하는 너무 많은 정경유착 면죄부와 하수인 리스트와 팔려간 신부들의 정조대에 우르르 쾅 불을 당겨 따뜻하게 평화롭게 불감증의 시대를 청소하고 싶어집니다

08.01.10/오후 4시 44분


15
밥과 자본주의
그러나 너를 일이키는 힘은 우리로부터 나온다

두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습니다 피웅피웅 소리뿐인 음산한 벌판에 두 나그네가 말없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모래바람 때문에 얼굴을 가린 두 나그네, 한쪽은 과거 또 한쪽은 미래라 이름하는 이 두 나그네는 오늘이라는 죽음의 강가에 이르러 비로소 발걸음을 멈추고 각자의 배낭 속에 든 운명의 시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황혼이 오기 전에 이 운명의 시체를 베고, 저 죽음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당도해야합니다 그러나 강은 깊고 그들은 강을 건널 아무런 나룻배도 갖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통한 침목을 깨고 한 쪽 나그네가 입을 열었습니다.

"죄없는 젊은이가 폭력의 고문으로 죽었다"

자 나를 보시지요 온몸에 맺힌 피멍울과 채찍 자국을 보시지요 나는 당신을 잉태한 저 팔십년대 당신의 전생이며 죽음입니다. 아무 죄 없는 젊음이가 폭력의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실로 아무 죄없는 젊은이가 단지 거짓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시대의 떡메를 알몸에 맞으며 처참하게 숨을 거뒀을 때, 그리고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니 죽었다고 고문관이 질술했을 때, 사람 사는 세상은 죽었습니다 "종철아 잘 가르래이 잘 가르래이......" 젊은이의 유골이 한줌 재가 되어 임진강 물굽이에 뿌려졌을 때 사람의 역사는 또 한번 죽었습니다 나는 팔십년대 당신의 역사이며 주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저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죽음를 건너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으흐흐윽윽......

이윽고 다른 한쪽 나그네가 강 위에 흐르는 침묵을 깨며 말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달리다 큼
울지마시오, 형제여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속에 우리 핏줄 속에 자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그를 다시 일으키는 힘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역사와 정치적 폭력이 그를 죽였지만 그러나 그를 일이키는 힘은 우리로부터 나옵니다 형제여, 어서 일어나시오 달리다 쿰, 어서 일어나시오 그를 일으키러 가야 합니다 어둠이 오기 전에 우리는 신념의 나룻배를 신축하여 저 죽음의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새로운 역사의 땅에 운명의 시체를 매장해야 합니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정의를 갈망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속에 그가 살아있습니다

그때 돌연 하늘에셔 거대한 합창소리가 울려퍼지며 땅으로 내려와 바다를 흔들고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울지 말아라, 죄 없는 젊은이는 죽지 않았다
그를 일으키는 힘은 너에게 있다
너희가 그를 다시 일으키고 말리라
어서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라
달리다 쿰, 달리다 쿰,
달 - 리 - 다 ...... 쿰!

08.010.11/낮 12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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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분노가 많았던 고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