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처서기處暑記
여름 들어 나는 찾아갈 친구도 없게 되었다
사글세로 든 시장 뒤 반찬가게 문간방은
아침부터 찌는 것처럼 무덮고 종일
아내가 뜨개질을 하러 나가 비운 방을 지키며
나는 내가 미치지 않는 것이 희한했다*
때로 다 큰 집쥔 딸을 잡고
객쩍은 농지거리로 핀통이를* 맞다가
허기가 오면 미장원 앞에 참외를 놓고 파는
동향 사람을 찾아가 우두커니 앉았기도 했다
우리는 곧잘 고향의 벼농사 걱정을 하고
떨어지기만 하는 소값 걱정을 하다가도
처서가 오기 전에 어디 공사장을 찾아
이 지겨운 서울을 뜨자고 별러댔다
허나 봉지쌀을 안고 돌아오는 아내의
초췌하고 고달픈 얼굴은 내 기운을 꺾었다
고향 근처에 수리조합이 생긴다는 소문이었지만
아내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어린것은
백일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웃지 않았다
처서는또 그냥 지나가버려 동향 사람은
군고무마 장사를 벌일 채비로 분주했다
08.01.08/ 오후 16시 58분
*희한稀罕하다 - 썩 드물거나 신기하다.
*핀통이 - 핀잔 - 남의 하는 짓을 언짢게 꾸짓음.
별러댔다 - 별르다 - 벼르다 - 어떤 일을 이루려고 미리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다
농지거리 - 농말 - 실없이 하는 웃음엣 소리.
웃음엣소리 - 웃기느라고 하는 말.'/웃음엣말
우스갯소리 - 우스개로 하는 말.
59
골목
이발 최씨는 그래도 서울이 좋단다
자루에 기계 하나만 넣고 나가면
봉지쌀에 꽁치 한 마리를 들고 오는
그 질척거리는 골목이 좋단다
통걸상에 앉아 20원짜리 이발을 하면
나는 시골 변전소 옆 이발소에 온 것 같다
술독이 오른 딸기코와 떨리던 손
늦어린애를 배어 뒤뚝거리던 그의 아내
최씨는 골목 안 생선 비린내가 좋단다
쉴새없이 싸움질과 아귀다툼이 좋단다
이발소에 묻혀 묵은 신문이나 뒤적이고
빗질을 하고 유행가를 익히고
허구한 날 우리는 너무 심심하고 답답했지만
최씨는 이 가파른 산동네가 좋단다
시골보다도 흐린 전등과 엠프 소리가 좋단다
여자글이 얼려 잔돈 뜯을 궁리나 하고 돌아가는
동네에 깔린 가난과 안달이 좋단다
그 딸기코의 병신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던가
사경을 받으러 다니던 딸의 이름은 무엇이던가
어느 남쪽 산골 읍내에서 여관을 했다는
이발 최씨는그래도 서울이 좋단다
골목에서 모여드는 쪼무래기 손님들과
극성스럽고 억척같은 어머니들이 좋단다
08.01.09/ 새벽 1시 0분
60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삐걱이는 강의실 뒷자리에서
이슬 깔린 차가운 돌층계 위에서
우리들은 처음 만났다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에서 온 친구들
비와 바람과 먼지 속에서
처음 우리는 손을 잡았다
아우성과 욕설과 주먹질 속에서
충무로 사가 그 목조 이충 하숙방
을지로 후미진 골목의 대폿집
폐허의 명동
어두운 지하실 다방
강의실에 찌렁대던
노교수의 서양사 강의
토요일 도서관의 정적
책장을 넘기면 은은한
전차소리
그래 겨울 나는 문경을 지났다
약방에 들러 전화를 건다
달려나온 친구
분필가루 허연 커다란 손
P는 강원도 어느 산읍에서
생선가게를 한단다 K는
충청도 산골에서 정미소를 하고
이제 우리는 모두 헤어져
공장에서 광산에서 또는 먼 나라에서
한방중에 일어나 손을 펴본다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것을
본다 솟구쳐오는 아우성소리
어둠 속에 엄겨드는 그것들을 본다
제주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비와 바람과 먼지 속에서
향수와 아쉬움과 보람 속에서
08.01.09/ 새벽 1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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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60편의 시들은
1975년 출간된 '농무' 라는 신경림 시인의 첫번째 시집이었습니다.
두 번재 시집은 1979년도에 나온
새재 라는 시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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