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67.68.69.70.71.72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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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돌개바람

청미래덩굴 덮인 서낭당 돌무덤
당산에 모여드는 검은 먹구름
상나무* 그늘에서 날 저무는 걸 보았다
묵밭에서* 우는 풀벌레소리 들었다

바람아 바람아 돌개바람아
돌아라 한백날 돌개바람아

사흘장 파장 끝낸 취한 장꾼들
침 두 번 뱉고 왼발 세 번 구를 제
내 온몸에 모래바람 엉겨붙더라
내 눈에서 파랑불꽃 번득이더라

바람아 바람아 돌개바람아
돌아라 한백날 돌개바람아

칠팔월 역병막이 수수깡 바자
동네 사람 돌팔매에 목 움츠리고
삼밭에 숨어 서서 그이 오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 달처럼 환히 뜨길 기다렸다


08.01.11/저녁 6시 29분
*상나무 -향나무
*묵밭 - 묵정밭 - 버려두어서 거칠게 된 밭/휴경지
역병막이 - 액막이- 민속에서 전염병 따위 몹쓸 병을 막는다고 집 안팎에 두는 물건.


68
江村

달래강 살얼음에 싸락눈이 깔렸네
먼 척 늙은 고모
바늘귀 더듬는 섣달 그믐

- 옛날 옛적 강 속에 이무기가 살았지
정갈한 처녀만 골라 잡아먹고 -

철로 위를 덜컹대는 느린 화차
홀로 지킨 마흔에 또 몇해
더 하나 느는 깊은 주름

지난일 다 잊고
애들 옷가지나 만지는
손주들 성화에 옛애기나 흥얼대는

- 천년을 닦아도 하늘길은 막혀
그믐이면 안개 되어 계족산을 감지 -

강언덕 잡초 위에 잔바람이 일었네
같이 늙은 아들 내외
잠 설치는 섣달 그믐

08.01.11/ 저녁 6시 35분


69
새벽

뱀이 숨었다 가시밭 속
산허리 낮게 감은 검은 구름
나무도 숨죽인 빛없는 한낮

나오라 나오라 외쳐대라
눈뜨라 눈뜨라고 불러대라
노랑치마 찢겨 걸린 탱자나무에
파랑속곳 짖어 묻은 모래무덤에

아이들 엎드렸다 돌밭 속
산 너머 들려오는 징소리가 두려워
돌로 바람 막고 모래 속에 숨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외쳐대라
눈뜨라 눈뜨라고 불러대라
노랑치마 파랑속곳 몸에 감고

뱀이 움직인다 가시밭에서
아이들 움직인다 돌밭에서
무거운 구름 걷히는 찬란한 새벽
나무도 몸 흔드는 환한 새벽

08.01.012/ 아침 8시 7분
신경림의 시에서 두렵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겁이 많은 사람은
노동운동을 할 수 없다.


70
밤길

강 하나 건너왔네 손도 몸도 내어주고
갯비린내 벽에 쩔은 엿도갓집 행랑방
감나무 빈가지 된서리에 떨면서
내 여자 몸 무거워 뒤채는 그믐밤
고개를 넘어섰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협궤차 삐걱대던 면소재지 그 새벽도
못 박힌 손바닥에 팔자로 접어뒀네
내 여자 숨이 차서 돌아눕는 시린 외풍
험한 살길 지나왔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엿기름 달이는 건넌방 큰 가마솥
빈 내기 화투소리 늦도록 시끄러운
내 여자 내 걱정에 피 말리는 한자정
강 하나 더 건넜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험한 살길 또 지났네 눈도 귀도 내 버리고

08.01.12/ 아침 8시 32분

71
4월 19일, 시골에 와서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위에
살구꽃이 피고 어지럽게
피어서 꺾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나는 남한강 상류 의진 읍내에 와서
통금이 없는 빈 거리를 헤매이며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티끌처럼 쏠리며 살아온 나날
틀처럼 뒹굴며 이어온 세월.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친구를 생각했다. 찬 돌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이 들었을 친구를
그 손톱에 배었을 핏자국을.

4월이 와도 바람은 그냥 차고
살구꽃이 피어도 흐느낌은 더 높은데
축축한 바람은 꽃가지에 매달려
친구들의 울음처럼 잉잉댔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08.01.12/ 낮 1시 12분

72
다시 南漢江 상류에 와서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종기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툇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산을 보고 섰다
배른땅은 여기서도 삼십리라 한다
궂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따라 후미진 바윗길을 들라 한다
목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재비 참새떼 몰려 웃고 까불어도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을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08.01.12 / 밤 11시 41분

신경림의 시에서 '부끄럽다' 와 '두렵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부끄러운 시대에 살았지만 같이 동참을
못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도 있을 것이고 도움이 못돼서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요.
시국의 데모에 앞장을 서는 것이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것이 명분과
목적이지요. 명분과 목적은 어떤 계기가 원인이 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명분과 목적은 두려움을 없애주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