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군자君子에서
협퀘열차는 서서
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
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
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산다는 것이 갈수록 부끄럽구나
분홍 커튼을 친 술집 문을 열고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나그네를 구경하고 섰는 촌 정거장
추레한 몸을 끌고 차에서 내려서면
쓰러진 친구들의 이름처럼 갈라진
내 손등에도 몇 줄기의 피가 밴다
어차피 우리는 형제라고
아가씨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난과 설움을 함께 타고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는 형제라고
역 앞 장터 골목은 누렇게 녹이 슬고
덜컹대는 판장들이 허옇게 바랬는데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
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뒤에서 이러헤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08.01.12/ 밤 11시 46분
74
港口
왼종일 부둣가를 맴돌다 돌아온다
창녀촌 근처 덜컹대는 하숙집
깨어진 거울 속 내 이마의 주름에도
축축하게 어느새 연기가 끼었다
바다에서는 바람만 세차게 몰아치고
좀체 잠이 안 와 다시 거리로 나서니
자정이 가까운 선술집 포장을 들치면
거기 모여앉은
투박한 새 친구의 얼굴들
아무렇게나 어울려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을 잊으리라 주먹을 쥔다
먼지를 털며 도망쳐나온 골목을
단무지를 집던 그 여자의 누렇게 뜬 손을
등줄기에 쏟아지뎐 친구들의 욕지거리를
바다에서는 바도소리만 높이 들려오고
외항선 검은 선체에도
불빛은 없아
08.01.12/ 밤 11시 49분
75
개치나루에서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다
그해 봄에 꽃가루가 날리고
꽃바람 타고 역병이 찾아와
마을과 나루가 죽음으로 덮이던 고장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
내 외로운 친구 숨죽여 떠돌다가
저 느티나무 아래
몰매로 묻힌 고장이다
바람아 다 잊었구나
늙은 나무에 굵은 살구꽃이 달려도
봄이 와서 내 친구 꽃에 불어 울어도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이곳은 내 진외가가 살던 고장이지만
죽음 위에 꽃가루 날리던 나루이지만
원동하게 내 친구 묻힌 고장이지만
모두 다 잊어버린 장바닥을 돌다
한산한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읍내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아 너는 잊었구나 그 이름
그 한 그 설움을
08.01.13 / 일요일 낮 11시 43분
진외가陳外家 - 아버지의 외가
76
東海紀行
도시의 온갖 쓰레기들에 묻어
큰 재를 넘어 이고셍 버려진다
거리에는 바닷바람이 불고
미루나무가 몸을 틀고 울고
구죽죽이 철늦은 비가 내렸다
읍내는 어둡고 답답했다
비린내가 밴 뒷골목을 찾아가
썩어서 문드러진 유행가를 들으며
서울에서 날아온 독한 소주를 마셨다
바다는 푸르고 차가웠지만
껌을 파는 어린 계집애는 맨발이었다
바닷가를 따라 올라가면
그고싱 할아버지의 고향이라고 자랑한다
멀리서 뱃고동이 울어도
이곳도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었다
한여름인데도 내 친구들은 추워 떨고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하고 미워했다
구죽죽이 철늦은 비가 내리고
부두에 낙보면 그곳까지도
도시의 찌꺼기들이 몰려와 아우성쳤다
갈매기가 떼지어 울고 머지않아
태풍이 올 것이라는 소문인데
이곳도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었다
전쟁이 다시 일 것이라고 수군대는
뒤숭숭한 뱃사람들을 헤집고 나가 서면
높은 파도만 방파제를 때리면 울었다
억센 파도만 가슮을 때리며 울었다
08.01.13 일요일 낮 4시 6분
77
송덕비頌德碑
1
-그해 을해와 병자
두 해에 걸쳐 큰 가뭄이 들다
배고파 우는 소리가 거리를 메우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 도둑의 떼
어진이 참다 못해 곳간을 열어
백 석 쌀 풀어 밥을 끓이고
온 고을 사람 모아 배를 불리다-
2
비석 뒤에 손들이 어른댄다
어진이 뜻 받들어 감읍하는 야윈 손
비석 둘레에 눈들이 두런거린다
절망과 체념으로 생기 잃은 눈
비석을 싸고 아우성이 엉겨 있다
저주와 분노로 일그러진 목소리
3
귀갓길 버스 또 골목 구멍가게 앞에서
떼로는 새벽 잠든 아이들 곁에서
주먹을 쥐어보다 문득 생각한다
잘난이들의 우스개가 되어
어진이들의 노리개가 되어
이리저리 벼슬대며 살아온 한세월을
송덕비 뒤에 어른거릴 내 손 내 한숨을
저주와 분노로 굳어진 내 목소리를
08.01.14/ 밤 1시 29분
어진御眞 - 임금의 화상이나 사진.
화상畵像 - ①어떠한 사람의 얼굴과 똑같게 그린 그림. ②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 의 비유
③생긴 꼬락서니.
78
비 오는 날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엇됨이 있겠는가
밤바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 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을 끄나풀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망산 그 한 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쓰러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08.01.14/ 밤 1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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