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고정희 유고시집 28.29.30.31.32.33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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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이 머리노동자에게

일년에 세번씩 추수하는 동남아에서나
일년에 한번씩 추수하는 북아시아에서나
농사꾼의 세상은 한가지로 쓸쓸 쓸쓸하니,
우리 농사꾼 땀에서 거둔 것은 똥값 오물값이 되고
당신네 지식인 머리에서나온 것은 기름값 금값이라지요
우리 농사꾼이 기댄 땅은 '농자천하지망'이 되고
당신에 식자층이 가진 땅은 '부자천하지본'이라지요

우루과이 라운드로 재갈을 물리고
어허 풍년이면 재앙이야
농수산물 수입개방 백골난망이야

땀에서 거둔 것이 똥값으로 둔갑하고
머리에서 나온 것이 금값으로 출몰하는 세상이
당신네 삼대를 누빈다 해도
농민은 거짓을 추수할 수 없습니다
농민은 전쟁을 추수할 수 없습니다
농민은 횡재를 추수할 수 없습니다
부자천하지본을 갈아엎는 날이 와도
땀에서 거둔 것은
백성의 내력을 그러안고 기다립니다
언젠가 새벽은 오겠지여?

08.01.16/ 오후 4시 22분

29
외경읽기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야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08.01.16/밤11시 39분

30
외경읽기
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마닐라의 아얄라 박물관을 들어서며
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고
필리피나가 내게 말했을 때
역사의 신경마다 불이 들어왔다
무릎 꺾인 시대의 황토벌 위에
긴 채찍 맞으며 서 있는 우리들,
머리를 깎이고
신발을 빼앗긴 사람들이
양순하게 허리를 낮춘 지점에서
아시아의 황혼이
수난의 비단길과 포옹하는 지점에서
허허허허 ...... 하느님의 외로움이 불타고
하하하하 ...... 우상들의 경전이 경전이 번개치는 지점에서
나는 피묻은 탄피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콸라품푸르의 국립박물관을 들어서며
역사는 흐른다, 고 말레이시안이 내게 말했을 때
제국주의 신경마다 불이 들어왔다
잉글랜드 해적선 강탈 앞에
모자를 벗어 든 사람들,
옆구리를 찔리고
가랭이를 벌린 여자들이
불타는 노을을 향하여 울부짖는 지점에서
아아아아 ...... 별들이 불을 끄고
우우우우 ...... 숲들이 쓰러지는 지점에서
나는 칼 맞고 쓰러진 땅의 피묻은 깃발 하나를 심장에 품었다

자카르타 메르데카 광장을 들어서며
당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고
인도네시안이 내게 말했을 때
망각의 신경마다 불이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선 철퇴 앞에
땅문서를 헌납하는 사람들,
미합중국의 대포 앞에
백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골 깊은 슬픔을 접어 종이새를 날리는 지점에서
일본제국주의 사무라이 장칼 아래
어린이를 사열하는 지점에서
아아 제 터를 빼앗긴 사람들이
두 손을 번쩍 든 지점에서
그러나 그러나
메르데카......
데르데가...... 합창이 지축을 흔드는 지점에서
나는 아시안의 피눈물로 얼룩진 독립만세 국기를 혈관에 실었다

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당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역사는 흐른다, 흐른다, 고 나는 서울을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08.01.16/ 밤 11시 49분

31.
외경읽기
전봉준이 서울에게

서울이여 내가 이제 네게로 간다
내가 이제 네게로 가며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너를
슬픔의 어머니라 쓴다
내가 이제 네게로 가며
양가죽 두루마리에
너를 어둠의 자궁이라 적는다
내 이리 호명함을 너 부인 못하리
네 속에서 태어난 것들,
네가 자랑스러이 키운 아이들은
백성들이 한평생을 의탁하는 저 토지에
썩을 권력의 뇌수관을 가득 묻은 채
이문옥의 옳은 손에 수갑을 채워 내 쫏고
배추농사 똥추로 짓이겨버린 뒤
꽃방석집에 앉아
페니스의 근육이나 주물럭거리며
수서지역 대음모 겁탈이나 나눠 먹고
정경유착 음탕한 외유나 즐기고도
뻔뻔스런 낯짝 한번 속일 줄을 모른다
구십년 동지섣달
설한의 비장한 골짜기에서
가시나무새 딱 한번 님, 하고 죽어도
실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이여
너는 이제 생기를 받아야 한다
피고름이 흐르는 권력을 갈아엎고
산청경계 아득한 폐수를 갈아엎고
에이즈로 힘 못 쓰는 정치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쟁기를 받아라
뜨거운 지열로 수술을 받아라
민초들의 연장이 칼이 되리라
민초들의 서러움에 내장을 씻어라
서울이여 너는 이제 새로 태어나야 한다

08.01.16/밤 11시 56분



32
외경읽기
성곽에 둘러싸인 외로움 건드리기 혹은 부활


1

마치 카프카의 '성'에 사는 케이, 성주 케이 같다고나 할까
나는 오늘밤 혁명을 꿈꾸네
동반자적 부활을 꿈구네
오만 오천 에이커의 평원 속에 있는
외로움의 집의 사건을 꿈꾸네

2

확실한 알리바이를 지우기 위하여
눈 내리는 광야를 걷고 또 걸어
나는 그대 사는 성곽에 도착하네
오만 오천 에이커의 대평원 속에
이쁘게 패인 내 두 발자국을
하얀 눈이 내려 흔적을 지우는 모습은 엄숙하네
그래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란 자손과 친구를 만드는 것이란 부질없는 말을 했지
오만 오천 에이커의 외로움을 건너봐
인생은 부질없는 엄숙함이란 생각이 드네

3

외로운 사람들의 눈물이 하늘로 올라가
눈이 되어 내려오는 밥이네
외로움에 둘러싸인 그대 성곽
단단한 빗장으로 고요한 그대 성곽 밑에서
나는 잠시 내가 지금 건너온 외로움의 연혁을 되돌아보네
지나온 길은 언제나 황혼빛이지
상처 자국마다 분홍 꽃잎을 달아주는 황혼의 따스한 손길이
내 박동을 진정시키네

4

저 성곽의 삼엄한 정보장치를 뚫고
그대 모르게, 바람처럼
성곽을 빠져나올 한 외로움을 기다리는 일은 사무 비장하네
검은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달려나오는 그대 외로움과
전퉁벌거숭이 내 외로움이 만나
두 손을 꼬옥 맞잡고
세상이 그윽하게 광야로 달려나가
성곽이 무너지게 얼싸안는 일,
광야 한복판
외로움의 장작불 괄게* 지펴놓고
두 영혼의 햇불을 돌리며
내게 강 같은 평화
우리 샘솟는 기쁨 노래하는 거,
오만 오천 에이커에 덮인
비정하고 비정한 눈을 후르륵 녹여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춤추는 밥과 혁명을 위하여
나는 지금 꿈의 봉화를 올리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넋이란 넋들이 삼지사방에서*
아아아아 ,,,,, 달려나오네
아 ∼ 아 ∼ 아 v 아 ∼ 내가 달려나가네
벌거벗은 외로움이 와지끈 얼싸안고
혁명의 사다리를 올라가네

6

그대 모르시게
벌거벗은 한 외로움과 다른 외로움이 만나
오만 오천 에이커의 벌판에 짜놓은 들비단을 보는가?
바람결에 들비단 흔들리는 모습 보는가?
쑥부쟁이 구엽초 당귀꽃 쥐똥오줌풀
바랭이 삐비꽃 바늘각시 원추리꽃
가람에 하늘비단 어리는 고요,
부드러운 혁명의 자궁을 보는가?

7

눈 덮인 광야를 걷고 또 걸어
굳건한 그대 성곽을 바라보며
오만 오천 에이커의 외로움 허물고 나면
저기 어스름처럼 서 있는 죽음의 그림자,
인생의 설한인들 뭐 그리 대수랴
죽음이 다시는 두렵지 않네
부활의 아침이 그닥 멀지 않네

8

대저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옷을 벗는 일이네
대저 혁명이란 무엇인가, 황야에 들비단 흔들리는 일이네
벌거벗는 두 몸에 하늘비단 굽이치는 모습 바라보는 아침에는
이별이 다시는 무섭지 않네

08.01016 / 밤 0시 13분
*괄게 - 불기운이 세다
*삼지사방 - 산지사방 산지사처 - 2여기저기의 사방



33
외경읽기
귀향의 노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의 짐짝 위에
아직 겨울 찬비가 줄기차구나
저기가 내 그리운 귀착지,
머나먼 여정을 달려온 나의 말이여
마중나온 북한산이 다가와
이제 무릇 날개를 접으라 한다
마중나온 관악산이 다가와
이제 응당 말을 놔주라 한다
속에서 시가 넘쳐흘러도
받아쓰지 않을 용기를 가지라 한다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내 푸득이는 어깨죽지를 더욱 작게 접어
고요의 평원에 착륙할 수 있을까
오랜, 도지는 신병 같은 내 말의 허기증을
뒤쪽으로 꾹꾹 눌러둘 수 있을까

도도한 저녁 숲에 상수리나무들이 젖고 있구나
내 자손만대도 젖고 있구나
여기가 내 사무치는 귀향지,
방울소리 설렁대는 나의 말이여
동행하는 안산이 나더러
이제 그만 상처를 싸매라 한다
동행하는 반월평야가 나더러
이제 그만 역마살을 동여매라 한다
한동한 눈 맞으며, 눈 맞으며 살자 한다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속에서 넘치는 말을 받아
눈그늘 깊게 하는 술 한동이 빚을 수 있을까
향내 진진한 술 한잔 받쳐들고
나는 너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08.01.17/아침 9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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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 20일
3일동안 고정희의 시를 보지 못했습니다.

참 할 말이 많았던 시인 같은데
가슴 속에
마저하지 못한 말을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을까요.

할 말을 다 하려면 오래, 오래 살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