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 최남선
불놀이 / 주요한
부끄러움 / 주요한
봄 / 황석우
첫날 밤 / 오상순
방랑의 마음 / 오상순
별의 아픔 / 남궁벽
북청 물장수 / 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 김동환
사랑 / 장만영
달·포도·잎사귀 / 장만영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여승 (女僧) / 백 석
바다와 나비 / 김기림
논개(論介) / 변영로
봄비 / 변영로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님의 침묵 / 한용운
향수 / 정지용
말(馬) / 정지용
세월이 가면 / 박인환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초혼(招魂) / 김소월
옛이야기 / 김소월
산유화 / 김소월
산 너머 남촌에는 / 김동환
보리 피리 / 한하운
봄은 간다 / 김 억
은행나무 그늘 / 백기만
가정 / 이상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
나그네 / 박목월
완화삼(玩花衫) / 조지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귀천(歸天) / 천상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기다림 / 모윤숙
사 슴 / 노천명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서시 / 윤동주
참회록 / 윤동주
별 헤는 밤 / 윤동주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하일 소경(夏日小景) / 이장희
도봉 / 박두진
해 / 박두진
내 소녀 / 오일도
눈 물 / 김현승
푸르른 날 / 서정주
국화옆에서 / 서정주
동천(冬天) / 서정주
가을에 / 정한모
외인촌 / 김광균
뎃생 / 김광균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산길 / 양주동
깃발 / 유치환
행복 / 유치환
바위 / 유치환
광 야 (曠野)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그 날이 오면 / 심훈
바라춤 - 서장 - / 신석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월광으로 짠 병실 / 박영희
유령의 나라 / 박영희
떠나가는 배 / 박용철
아침 이미지 / 박남수
새 / 박남수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 예이츠
내 마음은 / 김동명
파초 / 김동명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마음 / 김광섭
꽃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우울한 샹송 / 이수익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한
신록 / 이영도
개화 / 이호우
백자부(白恣賦) / 김상옥
강강술래 / 이동주
목숨 / 김남조
목숨 / 신동집
머슴 대길이 / 고 은
세노야 / 고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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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海)에게서 소년에게 / 최남선
1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2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결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3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4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조그만 산(山)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섬 손벽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5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깊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저 따위 세상에 저 사람처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6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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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놀 .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별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어시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절믄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리가 이스랴? ---- 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업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사라도 죽은 이마음이야, 에라 모르겟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 버릴가, 이 서름 살라 버릴가, 이제도 아픈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앗더니 겨울에는 말랏던 꽃이 어느덧 피엇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도라 오는가, 찰하리 속 시언이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상히 녀겨 줄 이나 이슬가......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덕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에 살고 십다. 저긔 저 횃불처럼 엉긔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십다고 뜯밖게 가슴 두근거리는 거슨 나의 마음 .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노픈 언덕 우헤 허어혀켜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불비체 물든 물결이 미친 우슴을 우스니, 겁 만흔 물고기는 모래 미테 드러벡이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오는 니즘의 形象이오락가락----- 얼린거리는 기름자, 닐어나는 우슴소리, 달아 논 등불 미테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뜯밖에 정욕(情欲)을 잇그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업슨 술도 인제는 실혀, 즈저분한 뱃 미창에 맥업시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업슨 쟝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니는 욕심에 못 견듸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여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뜯잇는드시 삐걱거리는 배잣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샹한 우슴이다. 차듸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우슴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긔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곳추 너의 뱃머리를 돌니
라. 물결 끝에서 니러나는 추운 바람도 무어시리오. 괴이(怪異)한 우슴 소리도 무어시리오, 사랑 일흔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의게야 무어시리오, 기름자(그림자) 업시는 발금(밝음)도 이슬 수 업는 거슬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노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셜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
창조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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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 주요한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솔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읍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따라 새 베는 임이
지름길에 나왔읍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읍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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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황석우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나무 나무에 바람은 연한 피리 불다.
실강지에 날 감고 날 감아
꽃밭에 매어 한 바람 한 바람씩 땡기다.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너와 나 단 두 사이에 맘의 그늘에
현음(絃音) 감는 소리.
새야 봉오리야 세우(細雨)야 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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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밤 / 오상순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바다 속에서
어족(魚族)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涅槃)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운의 성모 현빈(玄牝)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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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마음 / 오상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 .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한 푸른 해원(海原)---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향기
코에 서리도다.
동명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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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픔 / 남궁벽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어린 아이가 뒹굴을 때에
감응적으로 깜짝 놀라신 일이 없으십니까.
임이시요,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지상의 꽃을 비틀어 꺾을 때에
천상의 별이 아파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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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물장수 / 김동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동아일보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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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남촌에는 /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가,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에 타고서 고이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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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장만영
서울 어느 뒷골목
번지 없는 주소엔들 어떠랴,
조그만 방이나 하나 얻고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숨박꼭질하던
어린 적 그 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꼬옹꽁 숨어 산들 어떠랴,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단 한 사람
찾아 주는 이 없은들 어떠랴,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가난한 우리 들창을 비춰 줄 게다,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 틈
둥지 속 산비둘기처럼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의지하며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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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도·잎사귀 / 장만영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호젓하구나.
시건설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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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분수령 /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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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 (女僧) / 백 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 /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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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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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論介)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마음 흘러라.
신생활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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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
아, 찔림없는 아픈 나의 가슴 !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신생활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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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 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의 침묵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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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니
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 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
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
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
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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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정지용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조선지광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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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 / 정지용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정지용시집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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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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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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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招魂) /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진달래꽃 /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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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 김소월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읍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읍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어 두었던
옛이야기뿐만은 남았읍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몸을 울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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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 /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山에
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진달래꽃 /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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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피리 / 한하운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ㅡ ㄹ 닐니리.
보리피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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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간다 / 김 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이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비낀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태서문예신보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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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그늘 / 백기만
훌륭한 그이가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두 뺨이 타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바느질만 하였어요.
훌륭한 그이가 우리 집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그저 바느질만 하였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이에게 선물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이가 돌아간 뒤에 뜰 앞 은행나무 그늘에서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 집 작은 고양이는 봄볕을 흠뻑 안고 나무 가지 옆에 앉아
눈을 반만 감고 내 노래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 노래가 무엇을 말하였는지 누가 아시리까?
저녁이 되어 그리운 붉은 등불이 많은 꿈을 가지고 왔을 때
어머니는 젖먹이를 잠재려 자장가를 부르며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나는 어머니 방에 있는 조그만 내 책상에 고달픈 몸을 실리고 뜻도 없는 책을 보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 책에서 보고 있었는지 모르시리다.
어머니, 나는 꿈에 그이를, 그이를 보았어요.
흰 옷 입고 초록 띠 드리운 성자 같은 그이를 보았어요.
그 흰 옷과 초록 띠가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누가 아시리까?
오늘도 은행나무 그늘에는 가는 노래가 떠돕니다.
고양이는 나무 가지 옆에서 어제 같이 조을고요.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 바람처럼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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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 이 상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
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카톨릭청년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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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월(閏四月) / 박목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상아탑 /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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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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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玩花衫) / 조지훈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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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초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문장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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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눈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좀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開闢)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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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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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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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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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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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 모윤숙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 지지 않으로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方言)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 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강 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추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안으려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에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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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젊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山)을 바라다본다.
산호림 /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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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애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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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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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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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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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가 뛰놀아라.
금성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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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 소경(夏日小景) / 이장희
운모같이 빛나는 서늘한 테이블
부드러운 얼음 설탕 우유
피보다 무르녹은 딸길를 담은 유리잔
얇은 옷을 입은 저윽히 고달픈 새악씨는
기름한 속눈썹을 깔아 맞히며
갸날픈 손에 들은 은사시로
유리잔의 살찐 딸기를 부수노라면
탐홍색 청량제가 꽃물같이 흔들린다.
은사시에 옮기인 꽃물은
새악씨의 고요한 입술을 앵도보다 곱게도 물들인다.
새악씨는 달콤한 꿀을 마시는 듯
그 얼굴은 푸른 잎사귀같이 빛나고
콧마루의 수은 같은 땀은 벌써 사라졌다.
그것은 밝은 하늘을 비친 작은 못 가운데서
거울같이 피어난 연꽃의 이슬을
헤엄치는 백조가 삼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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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이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럼.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청록집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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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상아탑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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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녀 / 오일도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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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薄紗)의 아지랭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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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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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 /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하늘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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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현대문학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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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옆에서 / 서정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서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네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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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海底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읍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정한모 시선 "내 유년의 하늘엔"(미래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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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촌 / 김광균
하이얀 모색(慕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에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와사등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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뎃생 / 김광균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조선일보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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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 /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느린 그림자 이다지 어두어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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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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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 양주동
1.
산길을 간다, 말 없이
호올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 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 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3.
꿈 같은 산길에
화톳불 하나.
(길 없는 산길은 언제나 끝나리)
(캄캄한 밤은 언제나 새리)
바위 위에
화톳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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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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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정답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의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니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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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천리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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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 야 (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氾)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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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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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오면 /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曺)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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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춤 - 서장 - / 신석초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려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긴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으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刑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 이하 생략 =
문장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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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얇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조선일보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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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호수(湖水)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파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볓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동광 /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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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으로 짠 병실 / 박영희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의 한숨은
갈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은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한발 걸어오는 달님의
정맥혈로 짠 면사 속으로서 나오는
병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마한 병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짜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비인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이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이 때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와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이라 부르나이다.
그들의 손은 앓는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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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나라 / 박영희
꿈은 유령의 춤추는 마당
현실은 사람의 괴로움 불붙이는
싯벌건 철공장(鐵工場)
눈물은 불에 단
괴로움의 찌꺼기
사랑은 꿈 속으로 부르는 여신!
아! 괴로움에 타는
두 사람 가슴에
꿈의 터를 만들어 놓고
유령과 같이 춤을 추면서
타오르는 사랑은
차디찬 유령과 같도다.
현실의 사람 사람은
유령을 두려워 떠나서 가나
사랑을 가진 우리에게는
꽃과 같이 아름답도다.
아! 그대여!
그대 희 손과 팔을
너 어둔 나라로 내밀어 주시오!
내가 가리라, 내가 가리라.
그대의 흰 팔을 조심해 밟으면서!
유령의 나라로, 꿈의 나라로
나는 가리라! 아 그대의 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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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배 /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에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시문학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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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미지 / 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物象)들은 몸을 움직이며
노동(勞動)의 시간(時間)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太陽)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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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嬌態)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태양 /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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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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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 다오'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다하여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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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 예이츠
나 인제 일어나 가리, 내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가리,
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살이 집 짓고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통 하나 두고
벌떼 잉잉거리는 숲 속에 홀로 살리.
그리고 거기서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리 우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거든,
한밤중은 희미하게 빛나고, 한낮은 자주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차는 그곳.
나 인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찰랑대는 잔물결 소리 들려오는 그곳으로,
한길이나 잿빛 포도(鋪道)에 서 있어도
그 물결 소리 이토록 내 가슴 깊은 곳에 괴어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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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 김동명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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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 /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월광 /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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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그만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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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문장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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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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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타령조 · 기타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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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에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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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한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4월
--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드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드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소리도 흘러 오는데.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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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 이영도
트인 하늘 아래
무성히 젊은 꿈들
휘느린 가지마다
가지마다 숨 가쁘다.
오월(五月)은 절로 겨워라.
우쭐대는 이 강산(江山).
청저집 /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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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호우 시조집 /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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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부 / 김상옥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 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淳朴)하도다.
초적(草笛)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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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 이동주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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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 김남조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목숨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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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 신동집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 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者)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者)는 살은 자(者)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서정의 유형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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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대길이 / 고 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때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 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들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만인보(萬人譜) 제1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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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야 / 고 은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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