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고정희 유고시집...34.35.36.37.38.39.40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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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외경일기
어느날의 창세기


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강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스르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산들이 마을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나무들이 뿌리를 창궁으로 치켜들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생명 있는 것들의 너그러움
부드러운 흙가슴의 너그러움
공기의 너그러움
천체 운행의 너그러움일 거야
별들이 저마다 주어진 길을 돌고
바람이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우듯
핏물이 밥사발에 범람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너그러움일 거야
세계인의 신음소리가 하늘을 덮지 않는 것은
일말의 너그러움일 거야
돌들이 일어나서 소리치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어머니가 방생한 너그러움
임신한 여자가 담보 잡힌
너그러움일 거야
등뼈를 쓰다듬는 너그러움
살기를 풀러내는 너그러움
아아 우주의
너 ·그 · 러 · 움 · 일 · 거 · 야

08.01.17/아침 10시 37분

35
2부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말씀보다 더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잡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08.01.17/ 오전 10시 54분
*막막궁산莫莫窮山 - 적막하도록 깊고 높은 산


36
외경읽기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곷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신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을 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가 되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은 일이다?
그러나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08.01,17/ 오전 11시 15분
*일부종신一夫終身 - 아내가 남편이 죽은 뒤에 후살이를 가지 않고 일생을 마침


37
외경읽기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혀를 위한 잠언시편

1

참 끔찍한 한편의 드라마랄까
할 말을 다하고 사는 사람들의 평활한* 숲에는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혀의 뿌리가 있네
발 밑에 밟히는
주눅든 혀의 뿌리
깊고 어두운 숲의 뿌리가 있네
광활한 숲의 바람소리 밑동

2

할 말을 다하고 사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벽난로 속에는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혀가 타고 있네
따뜻하고 고요하게
불살을 밀어올리며
주눅든 혀의 순명이 타고 있네
침묵의 불그르매 어지러운 원무 속


3

친구여 그대도 어느 눈 내리는 날
벽돌찻집 벽난로가에 앉아
그대 누추한 영혼을 내려놓고
고전적으로 타고 있는
주눅든 혀의 불꽃을 보는가?
괄게 괄게 그대를 뎁히는 장작불 너머로
할 말을 다하고 사는 혀와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혀가 만들어내는
주화입마의* 구도를 보는가?


4

주화임마의 선시를 쓰는가?
오늘도 할 말을 다하고 사는 학자들이
텔레비전 배우로 단장하고 나와
말의 바벨탑을 쌓는 모습 엄숙하네
지금 사정거리 안에 있는 중동
바빌론의 대학살은 사필귀정이요
미국의 승리는 축전갑이라네
십오만 인민의 시체를 밟고
미국은 새 시대 주인공이 되었나?
부시가 스무 번의 기립박수를 받는 동안
시엔엔의 거짓말 레미콘 속에서
이라크의 혀는 완전 분해되었나?

5

그러므로 쿠웨이트는 꼭두각시 혈르 하사받았나?
오 친구여 나는 생각하네
이 조직적인 말의 골짜기에서
할 말을 다하는 혀를 놀린다는 것은
누기인가 또는 재앙인가

6

비장한 한편의 드라마랄까
토지처럼 말이 없는 혀가 있네
공기처럼 말이 없는 혀가 있네
강처럼 말이 없는 혀가 있네

08.01.17/ 오전 11시 49분
*平闊하다 - 널펀펀하다. 넓고 펀펀하다. 높낮이가 없이 번듯하게 너르다
주화입마走火入魔 - 화기가 머리 위로 치솟아 생기는 병


38
외경읽기
바이러스 엑스를 경보함

들마처럼 살아가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보니 딴사람이 되어 있다
폭군처럼 집착하던 술도 끊었고
업보이듯 끌고다니던 역마살도 거반 기가 죽었다
얼굴이 말개졌다
의사는 간염이라 진단했단다
이 차제에 아예
쓸데없이 비축해뒀던 쓸쓸한 방 한칸도
창고로 개축하여 넓게 쓰고 있단다
금이 아니면 은이라도 그 자리에
채워지길 고대하는 눈치다
이 눈치를 빌미삼아 나는
친구가 마시던 생수잔에서
용의주도한 신경의 날을 세워
바이러스 엑스를 검출해냈다
아래 그 내력을 적어두는 바이다

바이러스 X: 이십세기 자본주의 칸추리의 신종전병균
특성: 가변성 증폭성 신축성 일향성으로 분류
증상: 신사고 신인가 세계관을 신봉
침투경로: 돈하고 관계없는 일을 하나 거친 사람의 허파, 인본주의 세계관을 신뢰하다 좌초한 사람의 간, 일확천금을 손에 넣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동맥,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의 페니스 혹은 자궁......

처방: 예측 불허

경고사항: 불원간 밥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능력들은 사라질 것이다
내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돈인가, 밥인가, 시인가 점검하시압


*거반 - 거지반. 절반 이상 거의.
08.01.21/밤 0시 41분


39
외경읽기
다시 오월에 부르는 노래


1

붕대로 동여맨 오월이 또 찾아왔구나
베옷 입고
지랄탄 축포를 울리며
출산하는 여자처럼 고함치는 오월
상처에 파시스트 송곳을 들이대는 오월이 다시 찾아왔구나
강요된 슬픔의 퍼포먼스
스무살 꽃띠 청춘들이
서울의 지붕에 유서를 써놓고
알몸에 신나를 끼얹어
조국의 옥상에서 추락하는 오월, 오월

2

강경대는 몰매 맞고 어디로 가나
강경대는 몰매 맞고 죽어 어디로 가나
우리들 시대의 마침표
강경대는 용병대의 몰매 맞고 죽어 피 흘리며 어디로 가나
저승국 서울-1991번 도로에서
단군님의 베옷을 주홍으로 물들인
강경대는 죽어 어디로 가나
스무살 청춘들은 죽어 어디로 가나
썩은 지식의 곳간
말이나 표나게 잘 하는 입 뒤에 두고
분신한 혼백들은 어디로 가나

3

비록 내 아들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나는 더 많은 아들딸을 얻었습니다 내 가슴에 내 아들의 시신을 묻었지만 그로 인해 나는 더 많은 아들딸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눈물로 간증하는 조선의 어머니
가혹한 피 냄새로
한단계 눈이 밝아지는 역사

4

대물림을 자랑하는 저 음습한 경전
생사를 주관하는 파쇼 테러리즘 앞에서
그러나 그대가 외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대 저 수상스런 법전의 무덤을 파련?

5

모든 추락하는 날개에는 상처가 있다 모든 추락하는 날개의 상처에는 외경이 숨어 있다 모든 추락하는 날개의 상처에 숨어 있는 외경에는 길이 열려 있다 그대 다메섹 도상의 회심이 들어 있다
추락을 모르는 날개들이여
상처를 제비뽑기하겠다?

6

큰이름이 버린 시대, 그러나
큰이름이 버림받은 시대
육공을 살리는 새 이름이 태어난 시대
도청기를 단 오월이 다시 찾아왔구나
분 바르고
납작납작 절하는 오월이 또


08.01.21/ 밤 0시 50분

40
외경읽기
몌별사, 몌별사를 쓰는 봄이라고

몌별사, 이쪽이 저쪽에게
저쪽이 이쪽에게 원수 갚듯 몌별사를 쓰는 봄이라고?
사일구파가 오월에게
악취파가 신록파에게
수구파가 개혁파에게
노병대가 신참에게
교수대가 후학에게
지성인이 민초에게
당국이 시님에게
콩나룰공장이 샘물에게
빵공장이 농민에게
앙갚음하듯 몌별사를 쓰는 봄이라고?

봄이라고?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몌별사를 쓰다 나무둥치처럼 잠드는 봄이라고?
청취자가 방송에게
독자가 신문에게
노조가 간부에게
기자가 부장에게
백성이 공복에게 최고에게
난지도가 그린필드에게
양공주가 미국에게
시체가 검시관에게
나그네가 정객에게
폐수가 두산에게
오일팔이 삼김에게 별들에게
강산이 밀정에게
이판사판 메별사를 쓰다 바람처럼 엎드리는 봄이라고?

아아 몌별사,
서로가 서로에게 몌별사를 쓰고 길 뜨는 봄이라고?
(눈 감고 아옹, 하듯)
악바람이 신바람에게
자유주의가 민중주의에게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게
개량주의가 급진주의에게
주사파가 추수주의에게
학구파가 운동파에게
주류가 비주류에게
졸부가 필부에게(비수를 들이대듯)
검은 리본 펄렁거리며
몌별사를 쓰고 길 뜨는 봄이라고?

잘 가라 잘 가르라 잘 가래이
산낙지 씹어댈 무덤들아
강토를 뻘판으로 다 덮을 때까지
만-수-무-강-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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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궁산莫莫窮山 - 적막하도록 깊고 높은 산

*일부종신一夫終身 - 아내가 남편이 죽은 뒤에 후살이를 가지 않고 일생을 마침

*平闊하다 - 널펀펀하다. 넓고 펀펀하다. 높낮이가 없이 번듯하게 너르다
주화입마走火入魔 - 화기가 머리 위로 치솟아 생기는 병

*거반 - 거지반. 절반 이상 거의.


시를 보다가 모르는 단어나 아리송송한 단어가 나오면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는데
나 스스로도 잘못 쓰고 있는 단어들이 더러 있습니다.

거반이나 거지반 이런 말은 일상 구어체에서도 많이 쓰는데
'거반' 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지요.

거의반 이라고 잘못 쓰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