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승일교 타령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노래 2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고
짐승들 짝지어 진종일 넘고
강물 위에서는 네 목욕하고
그 아래서는 내 고기 잡고
물길 따라 네 뜨거운 숨결 흐르고
조상님네 사랑이야기
만주 넓은 벌 말 달리던 이야기
네 시작하면 내 끝내고
초저녁달 아래서 시작하면
새벽별 질 때 끝내고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너와 내가 닦고 낸 긴 길
형제들 손잡고 줄지어 서고
철조망도 못 막아
지뢰밭도 또 못 막아
휴전선 그 반은 네가 허물고
나머지 반은 내가 허물고
이 다리 반쪽을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었듯
98
곯았네
-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노래 3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못 본 체 넘어가면
우리 발이 밟힌다
샅샅이 찾아내고
구서구석 뒤져내자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잡풀 여뀌 엉거시풀
뽑기도 좋게 곯았네
피새놓이 웃음에
속아서는 안된다
슬그머니 내민 흰 손
잡아서도 안된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골골마다 헤집어라
썩은 것 마른 것 골라내자
숨겨주고 덮어주고
넘어갈 때 아니니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가려낼 때
속인 자를 가려낼 때
지금을 뿌리칠 때
거짓 손길 뿌리칠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찾아갈 때
내 형제 찾아갈 때
지금은 손잡을 때
내 친구만 손잡을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99
어머니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말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밤나무숲 오솔길을 지나 산기슭에
아버지와 함께 묻히신 그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 .
내가 묻힌 땅, 내 피가 스민 흙을 밝고 지나갈
수백만 형제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탱크소리가 아닌, 군홧발소리가 아닌
춤추든 가벼운, 기쁨에 들뜬 발자국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만세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터지는 포탄소리와 총소리가 아닌
감격과 기쁨의 만세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뼈와 살이 썩은 흙 위에서
형제들 얼싸안고 뒹구는 통곡소리를 들어야합니다
긴 사십 해 그리웠더 그리웠던 이름 외쳐 부르며
목놓아 우는 울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보아야합니다.
어른 아이 늙은이 젊은이 사내 계집 얼려
월워리청청 강강수월래에 맞춰 빙빙 돌아가는
끝없이 멀리 뻗친 크고 큰 춤을 보아야 합니다.
내 뼈를 쿵쿵 울릴 그 힘찬 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릴 업수이 본 자들은 우릴 속인 자들을
두려워 떨게 할 그 춤을 보아야합니다.
어머니
나는 노랫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둠 따위 가시밭 따위 불바다 따위 단숨에 몰아낼
그 큰 노랫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노랫소리에 놀라 도망칠
비겁한 무리들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
이 춥고 어두운 땅 속에 묻혀서
또는 구만리 적막한 황천을 떠돌며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 발자국소리 그 노랫소리 듣기까지
형제들의 그 큰 춤 보기까지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08.01.17/낮 12시 39분
100
북으로 간 친구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골마루에서 벌도 같이 서고
깊드리에서* 메뚜기도 함께 잡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할퀴고 꼬집고 깨물면서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큰 아이들의 꼬드김 때문에
우리는 물어뜯고 발길질하고
서로 붙안고 뒹굴었구나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눈과 귀가 찢어져 도깨비춤 추었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이간질에 넘어가
꼬임수에 빠져서 아우성에 넋이 나가
눈에 핏발 세우고 이 뿌드득 갈았구나
힘센 아이들한테 주머니 세간 바치고
발길질을 배우고 주먹지를 배웠구나
쇠꼬쟁이 얻어 품속에 감췄구나
고샅에서 모퉁이에서 바위너설에서*
마주치면 찌르고 할퀴었구나
숫돌에 벽돌짝에 쇠꼬챙이 같았구나
그리고는 우리는 헤어졌다
너는 북으로 나는 남으로
전쟁에 쫓겨서 죽음을 피해서
소꼬챙이 대신 어느새 우리 손에는
총과 칼이 쥐어져 있구나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 대신
피를 흘리며 싸웠구나
쏘고 찌르고 죽었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으름장에 속아서
음흉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 용심* 때문에
우리는 의좋은 형제였는데
땅 끝 하늘 끝까지 같이 가자던 친구였는데
이빨 부드득 갈며 노려보고 서 있었구나
친구의 피로 얼룩진
부끄러운 주먹 휘두르며 날뛰었구나
앞곤두* 뒷곤두에 외발걸음으로 설쳤구나
이승 저승 험한 고개도
함께 넘자던 친구였는데
죽살이라 돌밭길도
발맞추어 넘자던 친구였는데
크고 힘센 아이들의 눈웃음에 넘어가
아우성 손뼉 소리에 얼마저 빼앗겨
가진 것 모두 내 주었구나
우리 것 모두 빼앗겼구나
발길질에 주먹질 총질에 칼질만 배웠구나
그러는 사이 삼십년이 갔구나
사십년이 갔구나
이제는 서로 눈에 눈물 그득 담고
바라보고 서 있구나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구나
힘센 아이들한테서 얻은 쇠꼬챙이 버리는구나
주머니 세간 바치고 배운
발길질을 주먹질을 버리는구나
몸에 밴 것 몸에 걸친 것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을 팽개치는구나
손에 얼룩진 피 서로의 입김으로 닦는구나
찢어지고 째언지 눈과 귀에 입맞추는구나
부러지고 꺾어진 머리와 뼈에 입맞추는구나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따지기때* 풀개떡도 나눠먹고
장마 지난 도랑뒤짐도 함께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크고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크고 힘센 나라들의 장난질에 넘어가
08.01.17/낮 1시 17분
*깊드리 - 바닥이 깊은 논.
*바위너설 - 바위들이 삐죽삐죽 내 밀어 험한 곳.
*용심 - 남을 시기하는 심술.
*앞곤두 - 민 남사당패의 땅재주 놀음에서, 반듯이 서서 앞으로 서너 발짝 걷다가 몸을 솟구쳐 한번 곤두박질하고 바로 서는 재주.
뒷곤두 -
널뒷곤두 - 남사당패의 땅재주에서, 뒷곤두를 하되 나가 떨어지는폭을 더 넓게 하는 재주.
*따지기 때 - 이른봄에 얼었던 풀이 풀리려고 할 때. 해토머리
101
허재비굿*을 위하여
두 원혼의 주고받는 소리
잡아주오 내 손을 잡아주오.
흙 속에 묻힌지 삼십년
원통해서 썩지 못한 내 손을 잡아주오.
총알에 으깨어지고 칼날에 찢어진
내 팔다리를 일으켜주오.
밤마다 내 어머니 흐느껴 우는 소리 들리지만
나는 갈 수 없어,
산과 들을 헤매이며 찾는
어머니 통곡소리 들리지만 나는 못가.
철적은 비 구죽죽이 내리는 밤이면
머리 쥐어뜯으며 흐느끼기도 하고
늑대 애터지게 울어쌓는 찬새벽이면
엉금엉금 흙속을 기어보기도 하지만,
내 형제가 내 가슴을 쏜 것이
나는 원통해,
내 친구가 내 어깨 찌른 일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복사꽃 붉던 두 볼에 젖무덤에 허벅지에
검푸른 풀 돋으리라 어이 알았으리.
잡아주오 내 손을 잡아주오.
원통해서 썩지 못한 내 손을 잡아주오.
잡으리라 내 그대 손 잡으리라.
나 또한 어깨에 등허리에 머리통에
총알이 박힌 채 대창이 꽂힌 채.
우리가 쏘고 맞고 찌르고 찔리면서
죽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해.
새빨간 노을 속으로
가마귀떼 날아가던 그 가을 언덕을
나는 잊지 못해.
피 쏟으며 쓰러지던 그대 그
붉은 입술을 나는 잊지 못해.
삼천 날 삼천 밤을 뉘우쳤지,
흙 속에서 통곡하며 뉘우쳤지.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오, 미워하지도 않았다오.
잡으리라 내 그대 손 잡으리라.
아직 더운 내 입김으로 내 혓바닥으로
그대 상처 녹이리라.
그리하여 날아가리라 함께 날아가리라,
그대 어머니 내 어머니 울음소리 들리는 곳,
내 친구들 형제들 노랫소리 울음소리
가득한 곳으로.
잡으리라 원통해서 썩지 못한
그대 손 잡으리라.
*허재비굿은 동해안 지방에서 젊은 원혼의 인연을 맺어줄 때 하는 굿으로
서 화해의 뜻이 깊다.
08.01.21/ 오후 4시 39분
102
병신춤
춤추는 원혼의 소리
웃으라는구나 날보고만 웃으라는구나
부러지 목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해우채에 허갈진 논다니* 되어
조라치 절음 치면서 웃으라는구나
잊으라는구나 날보고만 잊으라는구나
들판에 행길에 서덜에* 널브러졌던 죽음들을
담벽에 돌둑에 산울타리에 묻었던
형제들의 살과 피를 잊으라는구나
먼 옛일이라 잊으라는구나
추라는구나 날보고만 곱사춤 추라는구나
잔칫집 차일 밑에서 백중날 난장에서
가을 운동회날 학교 마당에서
씰룩이 언청이에 곰배팔이라
갖은 못난 짓 다 해가며 곱사춤 추라는구나
웃으라는구나 날보고만 웃으라는구나
토시 속 채찍 반쯤 내보이며 추라는구나
날보고만 병신춤 추라는구나
08.01.21/4시 48분
*논다니 - 갈보. 노는 계집. 갈보- 몸을 팔아가며 천하게 노는 여자.
*서덜 - 냇가나 강가의 돌이 많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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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모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사전을 찾아서
보는데도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이라 쉽게
잊어버려요.
보면 보는대로 안 잊어버리고 쏙쏙 기억을 하는 방법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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