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85.86.87.88.89.80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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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어둠으로 인하여


복사나무 노간주나무 아래
여자들이 울고 있다

잡목숲 넝쿨 사이 스쳐온 한숨
모랫벌에 뱃전에 부서지는 물소리
고샅에 디딜방앗간에

어둠이 엉겨붙고 술렁이고
소용돌이치고 서로 부르고

원귀가 되어 잡귀가 되어
밤새껏 미친 듯이 맴을 돌고
춤을 추고

여자들이 울고 있다
형제들을 부르고 있다
노간주나무 물푸레나무 아래
어둠으로 인하여
원통한 죽음들로 인하여


08.01.15/ 밤 12시 33분

86
어느 장날

엽연초조합
뒤뜰에
복사꽃이 피어 밖을 넘보고 있다.

정미소 앞, 바구니 속에서
목만 내놓은 장닭이 울고
자전거를 받쳐놓은 우체부가
재 넘어가는 오학년짜리들을 불러세워
편지를 나눠주고있는 늦오후

햇볕에 까맣게 탄 늙은 옛친구 들이
서울 색시가 있는 집에서 내게
술대접을 한다.

산다는 일이 온통 부끄러움뿐이다가도
이래서 때로는
작은 기쁨이기도 하다.


87
산까치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
샛길을 지나 산등성이에 올랐다.
추위 떠는 여윈 풀꽃에 덮여
묵뫼는* 한 천년 엎드려 울고

땀을 식히며
고향의 헌거리를 굽어본다.

산까치가 될건가, 늙은 느티나무에
머리를 부딪치며 울고 싶은 산길
원통한 산바람

노예들의 헛된 싸움터를 좇아*
산성을 돈다. 머리로 종을 때려
깊이 잠든 친구들 깨워 세울
산까치도 될 수 없는 고향 언덕에서.


08.01.15/밤 11시 55분
*묵뫼 - 오래 거두지 않아서 거칠게 된 무덤. 묵무덤.
*좇아 - 남의 뜻을 따라 그대로 하다.



88
시골길에서

긴 능선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그 아래 하나 둘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거운 불빛
한 곳 트일 데 없는 막막한 어둠

하루쯤 후미진 산골을 돌아본들
넝마처럼 헤진 삶은 더욱 황랑하고
휴게소에서 내려
뜨거운 국수국물을 마신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뉘우치고만 있을 것인가
타락의 대열 한귀퉁이에서
파멸의 행진 그 한귀퉁이에서

대폿집에서 찻집에서
시골길에서
길은 어둠 속을 향해 뻗쳐 있고
다시 버스는 힘을 다해 달리는데
긴 능선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그 허공 속에서 문득
말없이 사는 이들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는다

08.01.15/ 밤 11시 58분

89
까치소리

간밤에 얇은 싸락눈이 내렸다
전깃줄에 걸린 차고 흰 바람
교회당 지붕 위에 맑은 구름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소리

싸락눈을 밟고 골목을 걷는다
큰길을 건너 산동네에 오른다
습기찬 판장 소란스런 문소리
가난은 좀체 벗어지지 않고
산다는 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몸부림 속에서 따뜻한 손들
들판에 팽개쳐진 이웃들을 생각한다
지금쯤 그들도 까치소리를 들을까
소나무숲 잡목숲의 철 이른 봄바람
학교 마당 장터 골목 아직 매운 눈바람

싸락눈을 밟고 산길을 걷는다
철조망 팻말 위에 산뜻한 햇살
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소리

08.01.16/ 0시 3분


90
벽지에서 온 편지

침침한 석윳불 아래 페스탈로찌를 읽는다
밭일에 지쳐 아내는 코를 골고
딸아이 젖 모자라 칭얼대는 초아흐레

서울 천리를 생각한다
통술집에 엉킨 뜨거운 열기
어지러운 노래

달빛이 깔린 교정을 걷는다
먼 마을 초저녁닭 소리를 듣는다
광부들의 칸델라 두런대는 불빛
교사를 돌아가 토끼장을 살핀다

다시 생각한다 서울 천리
만원버스에 시달리던 귀갓길
통행금지 직전

석윳불 심지 돋워 일지를 쓴다
일학년과 삼학년의 교안을 짠다
흐린 시험지에 점수를 매긴다
쑤세미처럼 거친 아내 손을 잡는다

08.01.16/난 2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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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낙엽을 보듯
무미건조합니다.

감정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것도 자기 자신을 안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감정조절을 잘 못해요.
감정의 호흡을 잘 조절하게 되면은 젖은 기침을 하지 않게 되겠지요.